이와 같이 일본의 한국 강탈의 야심이 노골화하고 그 강압이 날로 심하여 가자 상하 국민은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여러 계급이 여러 방면으로 반항 운동을 일으켜 혹은 입으로 붓으로 비분강개를 부르짖으며 혹은 무기로 실지 행동을 취하다가 많은 희생자가 경향 각처에서 속출하였다.
보호 조약이 맺어진 후부터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도 충청도의 민종식·허위, 전라도의 최익현·임병찬, 강원도의 이강년·유인석, 경상도의 신돌석·전우가 유명하였다. 장인환·전명운은 한국의 외무 고문이면서 도리어 일본의 주구가 된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샌프란시스코(San Frencisco)에서 암살하였다.
융희 3년(단기 4242년, 1909년) 10월에는 의사 안중근이 나라의 큰 원수요, 일제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하얼빈에서 쏘아 죽였으며 23세의 청년 이재명은 매국적 이완용을 칼질하여 두 사람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군인 박성환이 군대의 해산을 분하게 여겨 자살하자 이에 충동을 받은 우리 군대가 봉기하여 일군과 맹렬히 싸웠으며 해산당한 군대는 각지의 의병과 합력하여 5년 동안이나 일군과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