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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홉째 가름 두 차례 세계대전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 첫째 조각 1차 세계대전과 우리의 독립 운동은 어떠하였는가?
  • ② 1차 세계대전과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우리의 독립 운동은 어떠하였는가?

② 1차 세계대전과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우리의 독립 운동은 어떠하였는가?

한국이 나라를 빼앗긴 지 5년째 되던 해(단기 4247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5년 동안을 두고 공전의 큰 혈전을 계속하더니 단기 4251년(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대전 강화의 기본원칙 14조를 내 걸었다. 이 해 11월에 독일 측은 이 원칙을 좇아 항복하였으므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런데 윌슨의 원칙 14조 중에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의 한 조목이 있었으니, 즉 “여러 민족은 각자의 운명을 각자가 결정하라”는 것으로서 온 세계의 약소민족은 윌슨의 이 사상에 쏠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이를 환영하여 나라 안팎의 많은 지사들이 국민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마침내 세계 약소민족 독립운동사상 일찍이 없었던 기미운동을 일으켰다.

단기 4252년 기미년(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하여 수십만 군중이 서울로 올라오자 이를 이용하여 3월 1일 손병희·한용운·이승훈 등 전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써 서울과 지방에 일제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며 시위운동에 나섰다. 수십만 군중이 기약하지 않고 이에 발을 맞추어 천지는 온통 만세 소리에 파묻혔으며 이 신성한 자유의 종소리는 몇 날이 되지 않아 방방곡곡에 전파하여 전국의 남녀노소가 한꺼번에 일어났으며 국외 각지 동포의 호응과 아울러 우리의 굳센 혼을 세계에 알렸다.

일본인은 이 비무장한 모범적인 민족 운동에 대하여 폭력으로 탄압하여 수많은 민중이 이에 희생되었다. 그 중에도 수원군 제암리에서 일인이 취한 만행은 뒷날 일본 동경 지진 때 죄 없는 우리 동포 수만 명 학살 사건과 함께 그 잔악무도한 본성을 스스로 천하에 폭로한 것이었다.

【일인의 통계에 의하면 단체적 시위운동이 618건, 참가 인원 50여만 명, 사상 1,962명, 파괴되거나 불에 탄 관공서 159개 소라 하였으나 이는 물론 문제되지 않은 위조 숫자이며 참가 인원은 적어도 일천만은 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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