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1권)
  • 동국역사 권1(삼국기(三國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 임신(壬申) [602년]

임신(壬申) [602년]

【신라 진평왕 33년 ○ 고구려 영양왕 22년 ○ 백제 무왕 12년 ○ 수 양제 대업 8년 ○ 일황 추고 20년 ○ 서력 기원 612년】

봄 정월에 수(隋)나라 황제 양광(楊廣)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맞서 싸워서 크게 무찔렀다. 이에 앞서 배구(裴矩)가 수나라 황제에게 고구려를 협박하여 굴복시키라고 권하였다. 수나라 황제가 그 말을 따라서 고구려 왕을 회유하였으나 고구려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수나라 황제가 천하의 병사 113만 3천 8백 명을 선발하여 ‘2백만 명’이라고 호령하고는 아홉 갈래의 길로 나아가서 평양(平壤)에 총집결하고자 하였다. 이때 우문술(宇文述)과 내호아(來護兒) 등이 선봉이 되었는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진 깃발이 960리를 휘날리며,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렸다. 2월에 수나라 황제가 요수(遼水)에 도달하니, 고구려 왕이 을지문덕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을지문덕이 우문술의 군대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는 지치도록 하기 위해 거짓으로 7번 싸워서 7번을 도주하였다. 우문술 등이 곧 승리할 것이라 믿고 드디어 살수(薩水)【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를 건너서 평양성과 거리 30리 지역의 산에 의지하여 군영을 설치하였다. 을지문덕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하고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공(公) 등이 만일 군사를 되돌리면 우리가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문술이 자신의 군사가 지쳐 있어 다시 싸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또 평양은 성과 못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곧바로 군사를 보내 사방에서 습격하였는데, 싸우기도 하고 또는 쫓기도 하여 가을 7월 살수에 도달하니 수나라 군사들이 절반 정도 건너고 있었다. 이에 후미를 습격하여 크게 무찌르니, 수나라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많은 군사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장수와 병사들이 하루 낮 하루 밤을 도망쳐 돌아가서 압록강(鴨綠江)에 도달하니 450리였다. 내호아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처음에 수나라 9개 군대 중 요동(遼東)을 건넌 자가 대략 30만 5천 명이었으나, 요동에 돌아온 자가 겨우 2천 7백 명이고, 군량과 무기의 태반을 잃었다. 을지문덕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온화하며 지혜가 있었다. 또한 글을 잘 지어서 수나라 군사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시를 써서 보냈는데, “신기한 계책은 하늘의 흐름을 알고,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알았으니, 싸움에서 승리한 공이 이미 높아졌으니, 그만하면 만족할 만하니 이제 그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동방의 오언시(五言詩)가 이로부터 시작하여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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