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1권)
  • 동국역사 권1(삼국기(三國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 을사(乙巳) [645년]

을사(乙巳) [645년]

【신라 선덕 여왕 13년 ○ 고구려 보장왕 3년 ○ 백제 의자왕 4년 ○ 당 태종 정관 19년 ○ 일황 효덕(孝德) 원년 ○ 서력 기원 645년】

봄 정월에 백제(百濟)가 신라(新羅)를 침략하였는데 패하고 돌아갔다. 이때에 김유신(金庾信)이 백제의 7개 성(城)을 함락하고 돌아갈 때에 백제군이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신라 왕이 또다시 김유신에게 맞서 싸우도록 하니 김유신이 명을 듣고 처자식을 보지도 않고 다시 백제군을 역습하여 2천여 급(及)의 목을 베고 회군하였다. 그때 또다시 백제군이 크게 공격하여 왔으므로 신라 왕이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공 한 몸에 달려 있으니, 공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청컨대 다시 가도록 하라.”고 하니, 김유신이 또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곧바로 명을 따랐다. 이에 병사들이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들이야.”라며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향하니 백제군이 멀리서 보고 퇴각하였다.

○ 여름 5월에 당(唐)나라 황제가 고구려(高句麗) 안시성(安市城)【요동(遼東)에 있다.】을 공격하였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갔다. 처음에 당나라 황제가 정주(定州)【요동 지역】에 도달하여 곁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원래 중국의 땅이고, 수(隋)나라가 4차례 군사를 보냈지만 모두 크게 패하였으니, 짐이 지금 중국의 자제(子弟)들을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직접 활과 화살을 어깨에 차고 비옷을 안장 뒤편에 묶은 뒤 요수(遼水)의 돌아갈 다리를 끊어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을 보였다. 요동성을 포위하고, 성 아래에 도달해서는 직접 흙을 짊어지고 참호를 메우기도 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13일에 북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이 전투에서 고구려 병사 가운데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또 백암성(白巖城)을 함락하고 안시성으로 나아가 공격하니 고구려 장수 고연수(高延壽)가 말갈병(靺鞨兵) 15만 명과 연합하여 와서 지원하였다. 이때 그 군진의 형세가 40여 리에 이어져 있었는데, 당나라 황제가 이를 바라보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였다. 이에 기만하는 계책으로 고연수를 속여서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왕을 시해한 죄를 묻고자 한 것이지 다른 뜻이 없다.”라고 하니, 고연수가 그 말을 믿고 방비를 세우지 않았다. 당나라 황제가 이세적(李世勣)에게 명령하여 서쪽 언덕에 매복하고 다시 소수의 군사를 보내서 고연수를 유인하니 고연수가 과연 추격하여 왔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고 돌진하니 대적할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2만여 명이고, 고연수 등이 항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또 진군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여 포위하니 성주(城主) 양만춘(梁萬春)이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에 당나라 황제가 전투에 나아갔다가 날아온 화살을 눈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 또 요동이 일찍 추워지며 식량이 다 소진되었으므로 이에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다. 고구려 병사와 당나라 병사 가운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당나라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하며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와 같은 행동을 했겠는가?”라고 하였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이정(李靖)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무리들을 데리고 고구려 여러 성에서 곤욕을 당했다.”라고 하였다. 고연수는 당나라에 항복한 이후부터 분함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근심하다가 죽었다. 설인귀는 본래 요동 사람이다. 날래고 용맹함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고구려 사람이 문벌로써 사람을 등용하였으므로 설인귀가 등용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여 당나라에 들어가서 태종(太宗)의 신임을 받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때에 신라 사람 설계두(薛罽頭)가 또 당나라 병사를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앞서 설계두가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골품을 따져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功)이 있어도 선발되지 못하니, 내가 중원으로 가서 세상에 없는 뛰어난 지략을 펼치고 비상한 공적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당나라 황제에게 직접 자신을 천거하여 전투에 나아가 앞장서 싸우다가 죽으니, 당나라 황제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자신의 옷을 벗어 그 시신을 덮어 주고 대장군(大將軍)으로 추증하였다.

○ 신라 왕이 연호를 고쳐서 태화(太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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