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1권)
  • 동국역사 권1(삼국기(三國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 경신(庚申) [660년]

경신(庚申) [660년]

【신라 태종 무열왕 6년 ○ 고구려 보장왕 18년 ○ 백제 의자왕 19년 이 해에 망하였다 ○ 당 고종 현경(顯慶) 5년 ○ 일황 제명 6년 ○ 서력 기원 660년】

봄 3월에 당(唐)나라 황제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에 임명하고 김인문(金仁問)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임명하여 수군과 육군 13만여 명을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공격할 때에, 덕물도(德物島)【지금의 인천(仁川) 서쪽, 즉 덕적폐진(德積廢鎭)】에 이르니 신라(新羅) 왕이 김유신(金庾信) 등을 보내서 군사 5만으로 회동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에 재이(災異)가 많이 발생했다. 귀신이 궁궐 안에서 크게 소리치기를,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하고 곧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그 땅을 파서 보니 거북이가 있고 등에 문자가 있었는데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새겨져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이니 차지 않았으면 앞으로 찰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노하여 죽였다. 혹자가 아첨하여 말하기를, “둥근 달은 번성한 것이고 초승달은 미약한 것이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번성하고 신라는 미약한 것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평(佐平)【관직명】 흥수(興首)에게 계책을 물으니 흥수가 대답하기를, “용맹한 군사를 골라 선발해서 백강(白江)【백마강(白馬江)의 상류】과 탄현(炭峴)【지금의 공주(公州)에 있다.】을 지키도록 하여 나당 양군을 막게 하고, 우리는 성문을 닫아 견고하게 지키고 있다가 저들 병사들이 지치고 식량이 모두 소진되기를 기다려서 공격하면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수용하지 못하였다.

○ 가을 7월에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지금의 연산(連山)】에 진군하니 백제가 계백(階伯)을 보내 죽기를 각오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다. 이때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군사로 두 나라의 군사를 당해 내야 하니 존망을 알 수가 없고, 또한 처자식에게 누가 될 것이니 살아서 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결국 가족을 모두 죽이고 황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신라 병사를 만나게 되어 죽었다.

○ 신라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 도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때에 소정방 등이 백제군을 웅진(熊津)【공주 금강(錦江)】에서 대파하였다. 이때 김유신이 당나라 진영에 이르니 소정방이 김유신의 휘하 군사들을 붙잡고 기일을 지체하여 어겼다고 목을 베고자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크게 노하며 말하기를, “장군이 황산의 승전을 알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삼으니 내가 어찌 죄 없이 치욕을 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 먼저 당나라 병사와 결전을 치른 연후에 백제를 물리칠 것이다.”라고 하고는 도끼를 짚고 군문(軍門)에 서니, 성난 머리털은 곤두서고 허리에 찬 보검은 저절로 뛰쳐 올라 칼집에서 나왔다. 이때 김유신의 위풍과 검날의 번쩍임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다. 소정방이 크게 놀라서 김유신에게 사죄하고 곧 병사들을 합하여 백제 도성을 포위하니, 백제 왕이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고 태자 효(孝)를 데리고 도망하여 웅진을 지키고, 둘째 아들 태(泰)가 홀로 성을 지켰다. 소정방이 병사들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올라가 당나라의 깃발을 세우도록 하니, 이에 태가 성문을 열고 나아가 항복하고 백제 왕 의자(義慈)도 또한 와서 항복하니 백제가 드디어 망하였다. 백제가 온조왕(溫祚王)으로부터 의자왕까지 30대에 모두 678년이었다. 8월에 김유신이 큰 연회를 베풀고 소정방을 대접할 때에 의자왕에게 당(堂) 아래에 앉아서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가 모두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정방이 결국 백제 왕 의자와 그의 아들 효, 태, 융(隆), 연(演) 등과 대신, 장수 88명과 백성 12,807명을 포로로 삼아 당나라로 돌아갔다. 겨울 11월에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나라 황제가 의자왕을 위위경(尉衛卿)으로 추증하고 진숙보(陳叔寶) 묘 옆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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