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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癸酉) [문무왕 12년]

【당 고종 함형 4년 ○ 일황 천무(天武) 원년 ○ 서력 기원 673년】이었다.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관직명】 김유신(金庾信)이 죽으니, 나이가 79세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처음 김유신이 병세가 위독하자 왕이 직접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만약 세상을 떠나면 백성과 사직(社稷)은 어찌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삼한을 통일하고 백성에게 다른 마음이 없으니, 조금 편안하다고[少康]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통을 계승한 임금이 매양 수성(守成)하는 자가 드무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군자(君子)를 가까이하시고 소인(小人)을 멀리하시어 조정과 백성이 서로 편안하면 신이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부인 김씨(金氏)는 태종왕(太宗王)의 딸이다. 아들 5명이 있는데, 둘째 김원술(金元述)이 지난번 평양(平壤) 전투에서 패하여 자살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보좌 담릉(淡凌)의 말을 듣고 죽지 않았다. 이에 김유신이 가훈(家訓)을 저버렸다고 하여 곧 왕에게 아뢰어 목을 베고자 하니, 김원술이 잠시 두려워하여 밖으로 도망가 숨어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부친의 죽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뵙기를 청하였는데 모친이 말하기를, “네가 선친에게 죄를 지었으니, 내가 어찌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김원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담릉으로 인해 잘못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고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도망쳐 숨었다. 이후에 당(唐)나라 병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였을 때에 김원술이 이전의 수치를 갚고자 적에게 달려들어 힘껏 싸워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고 하여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유신의 부인은 이후에 비구니가 되었는데, 성덕왕(聖德王)이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매년 조(租) 1천 석(石)을 내렸다.

○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였다. 처음에 나마(奈麻) 덕복(德福)1)원문에는덕(德)으로 되어 있으나, 덕복(德福)으로 바로잡는다.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역법을 배우고 이때에 이르러서 귀국하였으므로 왕이 그 역법을 사용하였다.

○ 왕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화초를 심고 진기하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674).

○ 왕이 영묘사(靈廟寺) 앞에서 병사들의 훈련을 관람할 때에 아찬(阿飡)【관등명】 설수진(薛秀眞)이 육진 병법(六陳兵法)을 선보였다(674).

○ 동(銅)으로 만든 도장을 새롭게 주조하여 모든 관사(官司)와 주군(州郡)에 나눠 주었다(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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