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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乙丑) [광종 16년]

【송(宋) 태조(太祖) 건덕(乾德) 3년 ○ 일황 촌상 19년 ○ 서력 기원 965년】이었다.

가을 9월에 내의령(內議令) 서필(徐弼)이 죽었다. 서필은 이천(利川) 사람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또 직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왕이 금으로 만든 술잔으로 각 재신에게 하사할 때에 서필이 홀로 받지 않고 말하기를, “신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분수에 넘칠까 두려워했는데 지금 또 금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하시니 신이 더욱 황송합니다. 대개 복식과 용기는 등급에 구분이 분명하고, 사치와 검소함은 난을 다스리는 것과 관련이 있으니, 신이 만일 금으로 만든 잔을 사용하면 폐하께서는 장차 어떤 그릇을 사용하시겠습니까?”라고 하고 또한 말하기를, “폐하는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주지 말고, 공이 있는 자는 결코 잊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서필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그때에 왕이 귀화한 당(唐)나라 사람을 후하게 예우하여 매번 신하의 집을 빼앗아 주었다. 서필이 청하여 말하기를, “신의 집이 조금 넓으니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서필이 대답하기를, “지금 귀화한 당나라 사람들은 관직을 가려서 벼슬살이를 하고 집을 가려서 거처하는데, 세신(世臣)과 고가(古家)는 오히려 거처를 잃은 자가 많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먼저 자손의 생계를 위하여 신이 살아 있을 적에 거처를 바치고 다시 작은 집을 마련하여 신의 자손이 빼앗기는 폐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노하였다가 후에 후회하고 다시는 신료들의 거처를 빼앗지 않았다. 이처럼 꺼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시호를 정민(貞敏)1)원문에는 정경(貞敬)으로 되어 있으나, 정민(貞敏)으로 바로잡는다.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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