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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사(癸巳) [성종 12년]

계사(癸巳) [성종 12년]

【송 태종 순화(淳化) 4년 ○ 일황 일조(一條) 7년 ○ 서력 기원 993년】이었다.

봄에 상평창(常平倉)을 양경(兩京)과 12목(牧)에 설치하였다.

○ 겨울 10월에 거란[契丹] 소손녕(蕭遜寧)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서희(徐熙)를 중군사(中軍使)로, 최량(崔亮)을 하군사(下軍使)로 삼아 서쪽 경계에 나아가 적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 윤달에 왕이 안북부(安北府)【지금의 안주(安州)】에까지 행차하였다가 선봉사(先鋒使) 윤서안(尹庶顔)1)원문에는 진서안(陳庶顔)으로 되어 있으나, 윤서안(尹庶顔)으로 바로잡는다.이 거란에게 포로가 된 것을 듣고 서경(西京)으로 돌아왔다.

○ 사신을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 화친을 청하니 거란이 서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독촉하였다. 이때에 서희가 병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니 소손녕이 소리 질러 말하기를, “고구려(高句麗) 옛 땅은 모두 거란국의 영토인데, 지금 고려(高麗)가 강계를 침탈하였으니 이 때문에 군사를 움직인 것이다.”라고 하고 또 서신을 보내 속히 항복하라고 하였다. 서희가 서신을 보고 왕께 돌아가 아뢰기를, “화친할 만한 상황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사헌(司憲) 이몽전(李蒙戩)을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소손녕이 또다시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지금 우리 대군 80만 명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만일 강을 건너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몽전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군신을 모아 의논하였다. 혹자는 말하되 “왕의 어가는 도성으로 돌아가고 중신을 특별히 보내서 항복을 구걸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서경 이북을 잘라 주고 황주(黃州)로부터 절령(岊嶺)【즉 자비령(慈悲嶺)이다. 지금 서흥(瑞興)과 황주(黃州) 경계에 있다.】까지를 강계로 획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왕이 장차 영토를 떼어 주자는 의견을 따르고자 하였는데 서희가 말하기를, “지금 거란의 동경(東京)【요동(遼東)에 있다.】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 사이를 모두 생여진(生女眞)【즉 동여진(東女眞)】이 점거하여, 광종(光宗)이 이 지역을 빼앗아 가주(嘉州)【지금의 가산(嘉山)】와 송성(松城) 등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군이 온 이유는 이 두 성을 취하고자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고구려 옛 땅을 모두 차지하겠다고 한 것은 실상 우리를 겁주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그 군세가 성대한 것을 보고 곧 서경 이북을 떼어서 준다면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고 또한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이니 저들이 만일 끝없는 욕심으로 강제로 빼앗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면 이 땅을 모두 다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땅을 떼어 준다는 것은 만세의 수치가 될 것이니 청컨대 어가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 등이 한번 싸워 본 후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어사(御史) 이지백(李知白)2)원문에는 이지일(李知日)로 되어 있으나, 이지백(李知白)으로 바로잡는다. 또한 말하기를, “성조(聖祖)께서 창업하여 왕업을 물려주시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어찌 영토를 적국에게 가벼이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에 땅을 떼어 주겠다는 논의가 곧 잠잠해졌다.

○ 소손녕이 이몽전의 회신이 없는 것을 보고 안융진(安戎鎭)【지금의 안주에 있다.】을 공격하니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3)원문에는 문도수(文道秀)로 되어 있으나, 대도수(大道秀)로 바로잡는다.가 낭장(郎將) 유방(庾方)과 함께 맞서 싸워서 대파하였다.

○ 서희를 거란 진영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니, 거란이 군사를 돌렸다. 이때에 소손녕이 안융진에서 이미 패하였기 때문에 감히 병사를 내보내지 못하고 다만 항복을 재촉하였다. 왕이 군신을 모아 의논하여 거란 진영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물으니 감히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희가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드디어 강 머리까지 나아가 위로하며 송별하였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이르러서 통역인을 통해 상견례(相見禮)에 대해 물으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우리는 큰 나라의 귀인(貴人)이라. 마당에서 절을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 된 자가 임금께 절하는 것은 예에 맞지만, 지금 양국 대신이 상견하는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이 오만한가?”라고 하고 두세 번 오고 갔으나 소손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희가 관소(館所)에 이르러서 곧게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소손녕이 이에 당(堂)에 올라 예를 행할 것을 허락하였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이르러서 소손녕과 함께 서로 머리 숙여 예를 행한 후에 동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가 대등한 예를 굽히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속에 기이하다고 여겨 서희에게 말하기를, “고려와 신라(新羅), 고구려의 땅은 모두 우리나라의 옛 땅인데 지금 고려가 차츰차츰 침범하고, 또 우리와 영토가 서로 인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를 버리고 도리어 바다 건너 송(宋)나라와 화친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공격하러 온 것이니 만일 땅을 떼어 주고 교빙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만일 경계를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지금 요동에 있다.】이 모두 우리 경내에 있는 것이니 어찌 침범하여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압록강(鴨綠江) 내외가 모두 우리의 영역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훔쳐 차지하여 완악하고 변덕스럽게 길목을 막아서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우니, 사신이 오고 갈 수 없었던 것은 곧 여진 때문이다. 지금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서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어찌 교빙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말의 기세가 강개하며 언어가 사리에 맞으니 소손녕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화친을 허락하였다. 이어 연회를 열어 위로하고자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는 아무 탈 없이 병사를 거둘 수 있으나 귀국은 이미 병사들이 수고롭게 멀리서 와 상하가 모두 황황하고 창을 든 병사들이 모래사장에서 비바람에 노출된 채 있으니, 어찌 연회를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양국 대신이 상견하는데 환영하는 예가 없어서 되겠는가?”라고 하며 완곡히 청하였다. 이에 허락하고 매우 환대를 받으며 연회를 끝냈다. 소손녕이 드디어 거란 왕에게 아뢰니, 거란 왕이 곧 군사를 되돌리도록 명하였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머문 지 7일 만에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강 상류에까지 나와 맞이하였다. 그 다음해에 소손녕이 다시 서신을 보내 압록강 서쪽에 5개의 성을 쌓고 왕도 또한 압록강 동쪽에 지계(地界)를 정하여 성을 쌓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공사를 시작하여 마차와 말이 서로 통하게 하였다.

○ 시중(侍中) 박양유를 보내어서 거란에 이르니, 포로를 찾아 돌아오게 한 것이다(994). 서희가 말하기를, “신이 소손녕과 함께 여진을 토벌하고 옛 땅을 회복한 후에 서로 교빙하는 사신을 통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압록강 안쪽을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을 수복한 후에 교빙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교빙하는 것이 오래되면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사신을 보냈다.

○ 원욱(元郁)을 송나라에 보내어서 군대를 요청하였다. 왕이 거란에 보복하고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송나라가 답하기를, “북쪽 변경이 겨우 편안해졌으니 가볍게 움직이기 어렵다.”고 하고 다만 사신을 극진한 예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송나라와 서로 단절하였다(994).

○ 평장사(平章事) 서희를 보내어 여진을 쫓아냈다. 서희가 여진을 쫓아내고 장흥(長興)과 귀화(歸化) 2개 진(鎭)【지금 의주(義州)에 함께 있다.】과 곽주(郭州)【지금의 곽산(郭山)】, 귀주(龜州)【지금의 귀성(龜城)이다.】 2개 주(州)에 성을 쌓았다(994).

○ 국내를 나누어서 10도(道)로 정하니, 관내도(關內道)【지금의 기내(畿內)】, 중원도(中原道)【지금의 충주(忠州)】, 하남도(河南道)【지금의 공주(公州)】, 영남도(嶺南道)【지금의 상주(尙州)】, 영동도(嶺東道)【지금의 경주(慶州) 등지】, 강남도(江南道)【지금의 전주(全州) 등지】, 산남도(山南道)【지금의 진주(晋州) 등지】, 해양도(海陽道)【지금의 나주(羅州) 등지】, 삭방도(朔方道)【지금의 춘천강(春川江) 능안변(陵安邊) 등지】, 패서도(浿西道)【지금의 평양(平壤) 이서 지역】라고 하였다. 절도사(節度使) 등 관리를 각각 두었다(995).

○ 동자(童子) 10명을 거란에 보내 그 나라말을 익히고, 또한 거란에게 구혼하여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고려에 시집보냈다(995).

○ 철전(鐵錢)을 처음으로 주조하였다(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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