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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己酉) [목종 12년]

【송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 ○ 일황 일조 23년 ○ 서력 기원 1009년】이었다.

2월에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사신을 보내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불렀다. 이에 앞서 태후가 김치양(金致陽)과 함께 순을 죽이려다가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이 병상에 있으면서 중추부사(中樞副使) 채충순(蔡忠順)을 몰래 불러 말하기를, “밖에서 짐이 병상에 있다는 것을 듣고 왕위를 노리는 자가 있다고 하니 경은 아는가?” 하고는 이어서 1통의 서신을 내어 주니, 곧 환관(宦官) 유희창(劉熙昌)이 올린 것이었다. 그 서신에는 ‘김치양이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쓰여 있었으며, 이어서 또 1통의 밀봉된 서신을 내어 보이니 그 서신은 대량군 순의 서신인데, ‘간당(奸黨)이 신을 핍박하니 원컨대 구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다시 채충순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짐의 병은 점점 위독해져서 곧 죽을 것이다. 태조(太祖)의 손자는 오직 대량군뿐이니 경은 최항(崔沆)과 함께 사직을 힘을 다해 보전하라.”고 하였다. 이에 채충순이 최항, 유충정(劉忠正)과 함께 계책을 정하고 신혈사에 사람을 보내 순을 맞이하였다.

○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를 불러서 병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라고 하니 강조가 곧 병사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을 폐위시켜 양국공(讓國公)으로 삼고, 대량군 순을 옹립하였다. 강조가 병사를 이끌고 동주(洞州)【지금의 서흥(瑞興)】에 이르니, 간사한 사람 위종정(魏從正) 등이 반란을 꾸미고자 하여 강조를 속여 말하기를, “주상께서 병세가 악화되어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는데, 태후가 김치양과 함께 사직을 빼앗을 모략을 꾸미고 있다. 공이 거느린 병사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거짓 명령으로 불러들일 것이니 공은 본도(本道)에 속히 돌아가서 대의를 거하라.”고 하니 강조가 그 말을 따라서 곧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때에 태후가 과연 강조를 시기하여 절령(岊嶺)을 막고 지켰는데, 이 때문에 강조는 이미 왕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부사(副使)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병졸 5천 명을 거느리고 평주(平州)【지금의 평산(平山)】에 이르러서 왕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명을 거역한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크게 겁을 먹었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이러한데 중지시키지 못합니다.”라고 하니 강조가 결국 영추문(迎秋門)을 공격하여 들어갔다. 왕을 폐위시켜 양국공이라 하고, 대량군 순을 맞이하여 즉위시키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庾行簡) 등 7명을 죽이고 태후 친속 주정(周楨) 등 30여 명을 섬으로 유배 보냈다.

○ 강조가 전왕을 적성(積城)에서 시해하고 태후는 황주(黃州)에 도망가 살았다. 이에 앞서 왕이 귀법사(歸法寺)에 도망가 이르렀는데, 얼마 후에 강조가 왕과 태후를 충주(忠州)로 추방하였다. 왕이 강조에게 말을 청하니 강조가 단지 2필만 주었다. 이에 길을 가다가 태후가 음식을 들고자 하면 왕이 밥을 지어 직접 받들었고, 태후가 걷고자 하면 왕이 말의 재갈을 직접 잡고 적성에 이르렀다. 강조가 상약 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에게 사약을 바치도록 하여 왕을 시해하니, 나이가 30세였다. 문짝으로 관을 삼고 여관에 두었다가 한 달 뒤에 그 현의 남쪽에서 화장하고 능은 공릉(恭陵)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선영(宣靈), 묘호는 민종(愍宗)이라 하니 모두 강조가 선택하여 정한 것이다. 신민이 이를 듣고 크게 통탄하였으나 새로운 왕은 알지 못하였다. 그 이후에 거란[契丹]이 죄를 물었는데 왕이 그때 비로소 알고 성 동쪽에 이장(移葬)하였다. 능호를 고쳐서 의릉(義陵)이라 하고 시호는 선양(宣讓), 묘호는 목종(穆宗)이라고 하였다. 목종의 성품은 침착하고 강인했으며, 임금의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술과 사냥을 좋아하고 총애하는 간신을 너무 믿었다가 화가 미쳤다. 태후가 드디어 황주로 도망가 살았다.

○ 강조를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임명하고 채충순을 직중대(直中臺)로 삼았다.

○ 김씨(金氏)를 세워서 왕비(王妃)로 삼으니, 비는 성종(成宗)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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