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1권)
  • 동국역사 권3(고려기(高麗紀))
  • 문종(文宗)
  • 정미(丁未) [문종 21년]

정미(丁未) [문종 21년]

【송 영종(英宗) 치평(治平) 4년 ○ 일황 후냉천 22년 ○ 서력 기원 1067년】이었다.

거란[契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에 거란이 국호를 다시 요(遼)라고 하였으므로 축하의 말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 흥왕사(興王寺)【현재 풍덕군(豊德郡)에 있다.】가 완성되었는데, 모두 2천 8백 칸으로 12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공사가 끝났을 때에 왕이 5일 동안 주야로 연등회를 베풀고 또한 칙령을 내려서 여러 관서(官署)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개성부(開城府), 광주(廣州)【지금의 광주】, 수주(水州)【지금의 수원(水原)】, 양주(楊州)【지금의 양주】, 동주(東州)【지금의 철원(鐵原)】, 수주(樹州)【지금의 부평(富平)】 등 5개 주(州), 그리고 강화(江華)와 장단(長湍) 2개 현(縣)으로 하여금 대궐에서부터 흥왕사에 이르기까지 채색한 장식대를 연결하여 마치 비늘이 연이어 나열되어 있듯이 하고, 왕의 수레가 다니는 길 좌우에 연등을 산과 수풀처럼 만들도록 하니 그 밝은 빛이 대낮 같았다. 왕이 여러 대신을 거느리고 향을 피우고 재물을 바쳤는데, 불교 행사의 성대함이 예전에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금탑을 만드니 금이 144근, 은이 427근이나 들어갔으며, 연등회를 마친 뒤에 대사면을 하였다.

○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에서 물러난 최충(崔冲)이 죽으니(1068) 시호를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최충은 해주(海州) 사람으로 풍모가 아름답고 장대하였으며, 지조와 성품은 꿋꿋하게 바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또한 글을 잘 지었다. 다섯 왕을 차례로 섬기면서 당대에 명망이 매우 높았다. 현종(顯宗) 이후로 전쟁이 겨우 그쳤으나, 학문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이에 최충이 후진을 불러 모아 가르쳐 깨우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이때부터 배우고자 하는 무리가 몰려들어 길에 가득 넘쳤다. 드디어 9재(齋)에 나누어서 가르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중(侍中) 최공의 학도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는 자제들은 먼저 이곳에 소속되어 배우고 여름에는 승방(僧房)에 가서 여름 학기 학습[夏課]을 하였다. 그 배움이 우수한 자는 교사(敎師)가 되어 경사(經史)를 가르쳤으며, 간혹 정해진 시간 내에 시 짓기[刻燭賦詩]를 해서 그 등수를 게시하기도 하였다. 어른과 아이들이 나뉘어 서서 공식적인 자리[樽俎]나 나아가고 물러남에 예의를 갖추어 보는 사람이 모두 기뻐하며 감탄하였다. 이때에 또한 유신(儒臣) 정배걸(鄭倍傑) 등이 각기 학교를 설립한 것이 모두 12개였으나 그 번성함이 모두 최충에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학교가 일어난 것은 최충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고, 그 자손들 가운데 문장[文行]으로 재상이 된 자가 수십 명이었다.

○ 새로이 궁(宮)을 한양(漢陽)에 창건하고 이름을 ‘남경(南京)’이라 하였다(1068).

○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할 때에 전(田) 1결(結)은 둘레가 33보(步)이고 2결은 47보이며 그 이하는 모두 보수에 맞춰 결을 계산하였다(1069).

○ 동여진(東女眞) 15개 주의 추장이 와서 의지하며 군현(郡縣)이 되기를 청하였다. 이에 허락하고 각기 장군직(將軍職)을 주었는데 얼마 후에 서여진(西女眞) 또한 와서 의지하였다.

○ 일본인(日本人)이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며, 이후로부터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 송(宋)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안도(安燾)와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이 와서 송나라 황제의 명으로 의복과 띠, 비단 신발, 악기, 금은 공예품 등을 바쳤고, 이때부터 두 나라 사신의 행차가 해마다 이어져 왕래하였다. 이때 송나라 황제는 우리나라가 문장을 숭상한다고 하여 항상 사신을 보낼 때마다 반드시 문장에 뛰어난 자에게 국서(國書)를 작성하도록 하고, 파견될 사신은 중서성(中書省)에 불러들여 문장을 시험한 후에 보냈다.

○ 겨울 10월에 요나라의 사신이 내빙(來聘)하였다.

○ 사츠마주[薩摩州]가 와서 조공하였다(1080). 사츠마주는 일본의 별부(別府)이고 우리나라와 멀지 않은 곳이라 이후로는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