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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己卯) [숙종 4년]

【송 철종 원부(元符) 2년 ○ 일황 굴하 13년 ○ 서력 기원 1099년】이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왕비와 태자, 그리고 여러 신료를 데리고 양주(楊州)에 이르러 도읍을 정할 땅을 살펴보았다. 이에 앞서 위위승(衛尉丞) 김위제(金謂磾)가 왕에게 글을 올려 남경(南京)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은 “『도선기(道詵記)』에서 ‘고려(高麗)의 땅에 3경이 있어 송악(松嶽)1)원문에는 송악(松岳)으로 되어 있으나, 송악(松嶽)으로 바로잡는다.은 중경(中京)이고, 목멱벌[木覓壤]【즉 한양(漢陽)의 경내(京內)】은 남경(南京)이며,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니 11월부터 2월까지 중경에 머물고, 3월부터 6월까지 남경에 머물고, 7월부터 10월까지 서경에 머물면 36개 나라의 사신들이 찾아와 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르기를, ‘개국 후 160여 년에 목멱벌에 도읍을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이 바로 새로운 수도를 순행하여 머물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국가가 중경과 서경은 있지만 남경이 빠졌으니, 원컨대 삼각산(三角山) 남쪽과 목멱산 북쪽에 도성을 건립하여 수시로 순행하여 머물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또한 일자(日者) 등도 뜻을 함께 하였으므로 왕이 이에 삼각산에 행차하였다가 양주에 이르러서 도읍지를 살펴보았다. 2년이 지난 후 또 최사추(崔思諏)의 말을 따라 삼각산 면악(面岳)【즉 부아악(負兒嶽)】의 남쪽을 택해 도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 이에 앞서 왕이 윤관(尹瓘)의 말을 받아들여 동전[錢貨]을 주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주전도감(鑄錢都監)에서 아뢰기를, “백성이 비로소 동전 사용의 편리함을 알게 되었으니, 청컨대 종묘에 알리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은병(銀甁)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그 제도가 은 1근으로써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드니 민간에서는 ‘활구(濶口)’라고 하였다(1101).

○ 소태보(邵台輔)가 왕에게 말씀을 올리기를, “국학(國學)을 운영할 비용이 부족하니 청컨대 없애십시오.”라고 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 기자묘(箕子墓)를 찾아서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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