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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己丑) [예종 4년]

【송 휘종 대관 3년 ○ 일황 조우(鳥羽) 2년 ○ 서력 기원 1109년】이었다.

가을 7월에 9개의 성에서 철수하고 여진(女眞)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윤관(尹瓘)이 4개의 성을 쌓고, 또 함주(咸州)【지금의 함흥(咸興)】, 공험진(公險鎭)【지금의 길주(吉州)에 있다.】, 의주(宜州)【지금의 덕원(德源)】, 통태(通泰)【지금의 길주 남쪽에 있다.】, 평융(平戎)【지금의 길주에 있다.】 5개 성을 쌓고 남쪽 경계에 6만여 호를 이주시킨 뒤 돌아왔다. 얼마 지난 후에 여진이 자주 침략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나 오연총(吳延寵)이 이를 막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윤관 등을 보내 여진과 화친을 맺도록 하였다. 이때에 해마다 군사를 동원하고 군량을 공출하였으므로 안팎이 소란스럽고, 기근과 전염병까지 겹쳤다. 왕 또한 전쟁을 싫어하여 몹시 힘들어하였으므로 9개 성을 돌려줄 것을 의논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김인존(金仁存)이 강력히 말하기를, “만일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우리와 요(遼)나라 사이의 틈을 벌어지게 할 것이니 청컨대 옛 땅을 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결국 이를 허락하니, 여러 신하가 윤관과 오연총 등을 ‘공을 세우기 위해 이웃 나라와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였다.’는 죄로 논하자 왕이 어쩔 수 없이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 윤관이 죽었다(1111). 윤관은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장수와 재상이 되어서도 비록 전쟁 중이라도 항상 오경(五經)을 읽었으니, 그 어진 것을 좋아하고 선함을 즐기는 것이 한 시대에 으뜸이 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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