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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乙卯) [인종 13년]

【송 고종 소흥 5년 ○ 일황 숭덕 12년 ○ 서력 기원 1135년】이었다.

봄 정월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평장사(平章事) 김부식(金富軾)을 보내어서 토벌하였다. 이에 앞서 묘청이 역모할 뜻을 몰래 품고 있었는데, 마침 재해가 거듭 발생하게 되자 왕에게 서경으로 가서 재해를 피하라 권유하고 역모를 도모코자 하였다. 이에 김부식이 간언하여 멈추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묘청이 서경 분사 시랑(西京分司侍郞) 조광(趙匡)과 병부 상서(兵部尙書) 유참(柳旵) 등과 함께 서경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김부식에게 명하여 김부의(金富儀)와 이주연(李周衍) 등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김부식이 나아갈 때에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놓고 말하기를, “서경의 반란은 정지상(鄭知常)과 김안(金安), 백수한(白壽翰) 등이 함께 모의한 것이다. 지금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서경을 평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이에 세 사람을 불러 목을 벤 후에 왕에게 아뢰었다.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갈 때에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는 뜻을 잘 알아듣도록 타일렀다[효유(曉諭)]. 또 서경 성안으로 사람을 보내어서 효유하니 조광 등이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와서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스스로 죄가 무거워 용서받기 어려울까 봐 결정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었다. 마침 평주(平州)【지금의 평산(平山)】 판관(判官) 김순부(金淳夫)가 효유하는 내용의 조서를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가니, 서경 사람들이 드디어 묘청과 유참 등의 목을 베고, 태부경(太府卿) 윤첨(尹瞻)을 시켜 조정에 죄를 청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김부식이 또한 왕께 아뢰어 윤첨 등을 후하게 대우하여 그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을 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녹사(錄事) 백녹진(白錄珍)을 보내 주청하도록 하니, 개경[京師]에 이르러서 재상 문공인(文公仁)과 최유(崔濡) 등이 백녹진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한 명의 사신을 보내도록 아뢰어 효유하는 조서를 가지고 가서 항복하도록 한 것이다. 너희 원수의 공이 아니니 그대가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며, 또한 너희 원수가 서경으로 곧바로 가지 않고 길을 돌아서 안북(安北)【지금의 안주(安州)】으로 갔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다. 곧바로 윤첨 등을 하옥하고 또한 김부식을 재촉하여 나아가 토벌하도록 하니, 조광 등이 윤첨 등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드시 면죄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부식이 그 성이 험난하고 견고하여 공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5개의 성을 그 아래에 쌓고 밤나무를 쌓아서 병사들을 대치시켜 적들이 오래도록 곤란을 겪게 하였다. 적이 식량이 다 떨어지자 나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그 다음해 봄 2월에 김부식이 서경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조광은 불에 타 죽고 나머지 무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김부식을 수태위 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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