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1권)
  • 동국역사 권3(고려기(高麗紀))
  • 의종(毅宗)
  • 경인(庚寅) [의종 24년]

경인(庚寅) [의종 24년]

【송 효종 건도(乾道) 6년 ○ 일황 고창(高倉) 2년 ○ 서력 기원 1170년】이었다.

봄 정월에 왕이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스스로 지어서 여러 신하에게 보여 주니, 이에 신하들이 어쩔 수 없이 글을 올려 축하드렸다.

○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연등회를 관람하고 궁으로 돌아올 적에 채색을 한 누각을 좌우에 연결하고 갖가지 놀이를 벌여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다. 갖가지 보물과 수를 놓은 비단과 산호와 거북이 등 껍데기로 만든 패옥으로 장식하여 그 기묘함과 사치스러움이 그 어느 시절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 2월에 낭성(狼星)이 남극에 나타나자 안렴사(按廉使) 박순하(朴純嘏)가 노인성(老人星)이라 부르고 말을 달려 아뢰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내전(內殿)에서 직접 제사를 지내니, 여러 관료가 글을 올려 축하드렸다.

○ 가을 8월에 상장군(上將軍) 정중부(鄭仲夫) 등이 반란을 일으켜서 문신을 모두 죽였다. 이때에 왕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였는데, 문신들과 함께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때에 왕을 호위하여 따르던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원한을 품고 원망하는 말이 있었다. 이에 견룡산원(牽龍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등이 정중부의 마음을 움직여서 말하기를, “문신은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해 있는데 무신들은 굶주리고 힘들어하니 이를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김돈중(金敦中)이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시관(內侍官)이 되었는데, 나이가 어리고 기세가 대단하여 궁궐 뜰에서 밤중에 역귀를 쫓는 나례 의식을 하다가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다. 이에 정중부가 화를 내며 김돈중을 때리니, 김돈중의 부친 김부식(金富軾)이 왕에게 아뢰어 정중부의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정중부를 아꼈으므로 조용히 도망하도록 하니 이때부터 정중부가 김돈중을 깊이 원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의방과 함께 문신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갈 적에 정중부가 이의방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때에 왕이 무신들이 원망하는 것을 알고 무신들로 하여금 수박희(手搏戱)를 하도록 하고 후히 상을 내려서 그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문신 한뢰(韓賴) 등이 무신들이 총애받는 것을 시기하여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려 모욕을 주었다. 왕 또한 곁의 신하들과 함께 옆에서 조롱하며 비웃었다. 이에 정중부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이소응이 비록 무부(武夫)지만 관직의 품계가 3품인데 어찌 능멸하는 것이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 주었다. 마침 왕이 보현원에 이르니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거짓 왕명으로 순검군(巡檢軍)을 불러 모아 문신 이종식(李宗植)과 이복기(李復基)를 죽였다. 이에 한뢰가 놀라 도망하여 왕의 평상 밑에 숨어서 왕의 옷을 끌어당기자, 이고가 그의 목을 잘랐다. 이에 문신과 환관을 모두 죽여서 시체가 산과 같이 쌓였다. 이고와 이의방 등이 또 개경[京城]에 사람을 보내 추밀사(樞密使) 양순정(梁純精) 등 10여 명과 태자궁 관료들을 죽이고 도로에서 크게 소리 지르기를, “무릇 문관의 의관을 한 자들은 비록 서리(胥吏)라도 모두 죽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병졸들이 이 틈을 타서 봉기하여 평장사(平章事) 최포(崔褒)와 지추밀사(知樞密使) 서순(徐醇), 대사성(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등 50여 명을 죽였으며, 드디어 왕을 협박하여 궁궐로 돌아왔다. 9월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에 들어가니 환관 왕광(王光)이 정중부를 토벌하고자 하다가 일이 누설되었다. 이에 정중부가 환관 등 수십 명을 죽이니, 당시 총애받던 신하는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왕은 음악을 즐기고 술을 마시면서 의기(意氣)가 평소와 같았다. 이고 등이 왕을 시해하고자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왕을 군기감(軍器監)으로 옮겨 모셨으며, 태자는 연은관(延恩館)에 감금하였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문신 가운데 죽음을 면한 자라도 모두 잡혀 치욕을 면치 못하였다. 오직 평장사 최유청(崔惟淸)과 서공(徐恭) 등은 원래 무신들이 존경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을 둘러싸 호위하여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 두 사람의 친족들도 모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전중급사(殿中給事) 문극겸(文克謙)은 변란 소식을 듣고 도망쳐 숨어 지내다가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이때 문극겸이 말하기를, “나는 문극겸1)원문에는 문극잠(文克譧)으로 되어 있으나, 문극겸(文克謙)으로 바로잡는다.이다. 왕이 만일 내 말을 따랐으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원컨대 날카로운 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길 원한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들이 그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라고 하고 죽이지 않았다. 김돈중은 감악산(紺嶽山)【지금의 적성(積城)에 있다.】에 도망가 숨었는데 정중부가 쫓아가서 죽였다. 이때에 정중부 등이 또한 군사를 풀어서 죽인 문신들의 가옥을 부수었으니, 이후부터 무인들이 원한이 있는 자의 집을 부수는 일을 일상처럼 하였다.

○ 9월에 정중부 등이 왕을 협박하여 거제(巨濟)에서 왕위를 내놓도록 하고 태자는 진도(珍島)로 내쫓고 왕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