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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丙辰) [명종 26년]

【송 영종(寧宗) 경원(慶元) 2년 ○ 일황 후조우 11년 ○ 서력 기원 1196년】이었다.

여름 4월에 장군 최충헌(崔忠獻)이 그의 동생 동부 녹사(東部錄事) 최충수(崔忠粹)로 하여금 이의민(李義旼)을 죽이도록 하고 조정의 신하까지 많이 죽였다. 이때에 이의민이 흉악하고 방자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그의 아들 이지영(李至榮)이 왕이 총애하는 궁녀를 강간하니, 조정과 백성이 모두 분통해 하였다. 또 이지영이 일찍이 최충수 집의 비둘기를 빼앗은 적이 있었다. 최충수는 우봉(牛峯)【금천(金川)】 사람으로 형 최충헌과 함께 모두 사납고 거칠었으며 용감하였다. 최충수가 최충헌에게 말하기를, “이의민 네 부자는 나라의 도적입니다. 제가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최충헌이 허락하였다. 마침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할 때에 이의민이 병을 핑계로 따르지 않고 미타산(彌陀山) 별정(別亭)에 갔다. 이에 최충헌이 최충수와 그의 조카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목을 베었다. 이에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가마를 재촉하여 궁으로 돌아왔는데, 최충헌이 곧 왕에게 보고하고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李至純), 이지광(李至光), 이지영의 목을 베었다. 또 경주(慶州)에 사신을 보내 이의민의 삼족(三族)을 모두 멸하였다. 최충헌이 이의민의 당파를 체포할 때에 상장군(上將軍) 길인(吉仁)이 장군 유광(兪光)과 박공습(朴公襲)1)원문에는 박광습(朴光襲)으로 되어 있으나, 박공습(朴公襲)으로 바로잡는다. 등과 함께 무기고의 병장기를 꺼내어 금군(禁軍)과 환관, 노비 1천여 명에게 나누어 주고 최충헌과 싸웠으나 길인이 패하여 도망하였다. 이때 왕이 최충헌을 불러들였는데, 최충헌이 길인이 궁궐 안에 있을까 의심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난입하여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니 시체가 어지럽게 쌓였다. 유광과 박공습은 모두 자살하고 왕의 좌우에는 오직 궁녀 몇 사람만이 곁을 지키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길인은 북산(北山)으로 도주하여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었다. 또 최충헌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인성(李仁成)과 승선(承宣) 문적(文迪)과 최광유(崔光裕), 대사성(大司成) 이순유(李純裕) 등 36명을 죽였다. 문적의 처 최씨(崔氏)가 쌓여 있는 시체 가운데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서 짊어지고 가니, 최충헌이 그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10조를 아뢰어 청하니 왕이 모두 따랐다. 최충헌을 좌승선(左承宣)으로 삼았다가 이윽고 어사대(御史臺)의 지사(知事)로 삼고 최충수와 박진재 등에게는 공신 호를 내렸다.

○ 최충헌이 자신의 권력이 나뉘어질까 두려워 내시 이분(李芬) 등 50여 명을 파면하여 내쫓고 또한 왕자와 소군(小君)2)왕후 이외의 몸에서 태어나 승려가 된 왕자를 말한다. 등은 절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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