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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丁卯) [희종 3년]

【송 영종 개희(開禧) 3년 ○ 일황 토어문 9년 ○ 서력 기원 1207년】이었다.

봄 정월에 도량을 중방(重房)에 설치하였다. 그 전해에 무관이 많이 죽은 후부터 무관들이 원망하기를 ‘문신이 저주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내시로 하여금 도량을 중방과 장군방(將軍房)에 설치하여 액운을 물리치기를 기원했다.

○ 이에 앞서 최충헌(崔忠獻)을 문하시중 진강군 개국후(門下侍中晋康郡開國侯)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진강후(晉康侯)를 더하여 봉하였다. 그 부서를 흥녕(興寧)1)원문에는 숭녕(崇寧)으로 되어 있으나, 흥녕(興寧)으로 바로잡는다.이라 하고 관료를 두었으며, 흥덕궁(興德宮)을 그 밑에 소속시키니 왕자와 재상 이하가 모두 그 부에 가서 축하연을 열었다. 이때에 꽃과 과일, 관현악기의 풍성함이 삼한 이래 신하의 집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시종과 문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다시 중서령(中書令) 진강공(晉康公)에 봉해지니 최충헌이, “작위는 5등급 가운데 으뜸이고 중서령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이다.”라고 하면서 사양하고 이를 받지 않았다.

○ 대장군(大將軍) 박진재(朴晋材)가 자신의 문객 가운데 관직을 제수받은 자가 적다면서 최충헌을 원망하여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최충헌이 이를 미리 알고는 그를 불러 묻기를, “자네가 어떤 까닭으로 나를 제거할 계책을 꾸미는가?”라 하고는, 좌우로 하여금 그의 다리 힘줄을 끊어 버리고 백령도(白翎島)【지금의 장연(長淵)에 있다.】로 유배 보내니, 박진재가 결국 병으로 죽었다.

○ 왕이 술사(術士)의 말을 들어서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의 집으로 옮겼다. 최충헌이 어가를 맞이하여 장수를 기원하였고 여러 왕자와 재추(宰樞)가 모두 곁을 모셨다. 수놓은 비단으로 두른 누각과 오랑캐와 중국의 잡스러운 놀이의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하였다.

○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의 노인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친히 술과 음식을 권하였다. 효도하고 조부모를 잘 모신 자, 절의가 있는 자,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자,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자에게 재물과 음식을 하사하고, 군현(郡縣)에서도 또한 따르도록 하였다. 근래에 나라에 재난이 많아서 이러한 예식을 오랫동안 폐지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시행하였다.

○ 청교(靑郊)【지금의 송도(松都)에 있다.】의 역리(驛吏) 등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최충헌이 이들을 붙잡아 국문할 때에 우복야(右僕射) 한기(韓琦)가 연루되었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최충헌이 한기와 그의 세 아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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