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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丙子) [고종 3년]

【송 영종 가정 9년 ○ 일황 순덕 6년 ○ 서력 기원 1216년】이었다.

가을 7월이었다. 이때에 금(金)나라가 몽고(蒙古)에게 괴롭힘을 당하니 금나라 선무사(宣撫使)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遼東)을 근거지로 해서 반란을 일으켜 천왕(天王)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대진(大眞)이라 하였다. 금나라 사람들이 장차 군사를 일으켜 몽고를 공격하고자 하여 군량과 말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

○ 8월에 거란[契丹]이 침략해 오니 상장군(上將軍) 노원순(盧元純) 등을 보내서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거란의 한 종족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하삭(河朔)의 백성을 위협하여 항복시키고 스스로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고 칭하고 연호를 ‘천성(天成)’1)원문에는 원성(元成)으로 되어 있으나, 천성(天成)으로 바로잡는다.이라 하였다. 몽고군에게 쫓기다가 그들의 장수 아아(鵝兒)와 걸노(乞奴)로 하여금 먼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서 회령(會寧)과 삭주(朔州) 등의 군을 침범하여 재물과 곡식, 가축을 약탈하고 운중도(雲中道)【지금의 북관(北關)에 있다.】로 이동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삭주분도(朔州分道) 장군 노인수(盧仁綏)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노원순을 중군 병마사(中軍兵馬使)로 삼고 오응부(吳應夫)를 우군 병마사(右軍兵馬使)로, 김취려(金就礪)를 후군 병마사(後軍兵馬使)로 삼아서 13영군(領軍)과 신기군(神騎軍), 여러 위병(衛兵)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적병들이 이미 영덕성(寧德城)【지금의 의주(義州)에 있다.】을 도륙하고 안(安)【안주(安州)】, 의【의주】, 철(鐵)【철산(鐵山)】, 선(宣)【선천(宣川)】 등의 주(州)들로 나아가 포위하고 서신을 보내서 항복을 독촉하였다. 이때 적들이 우리나라 사람 양수척(楊水尺)2)후삼국과 고려 시대에 떠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거나 고리를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천인을 말한다.을 얻어서 향도(鄕導)로 삼았다. 양수척은 태조(太祖)가 백제(百濟)를 공격할 때에 용맹하고 사나워서 다루기 힘들었던 자들의 자손이었다. 사냥을 하면서 살았는데 최충헌(崔忠獻)의 핍박을 참지 못하고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 산천의 험한 요지를 모두 알려 주었다. 삼군(三軍)이 연주(連州)【지금의 개천(价川)】에서 적을 맞아 싸워서 수천 명의 목을 베고 또 연주(延州)【지금의 영변(寧邊)에 있다.】 개평역(開平驛)에서 싸웠다. 이때 김취려가 거란군을 크게 물리치니 거란군이 묘향산(妙香山)【지금의 영변에 있다.】으로 들어가서 청채진(淸寨鎭)【지금의 희천(熙川)에 있다.】을 지나 도망가니, 전후로 죽은 적들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적이 이미 물러났으므로 삼군이 연주(延州)로부터 회군하다가 박천(博川)에서 거란군과 다시 마주쳤는데, 김취려가 힘껏 싸워서 격퇴하였다. 김취려는 능히 적은 병사로 많은 적을 물리치고, 기발한 계책을 내어서 매번 싸워서 승리하였다.

○ 겨울 10월에 많은 병사가 거란군과 위주(渭州)【지금의 가산(嘉山)】 성밖에서 싸우다가 패하니, 수도가 크게 동요하였다. 적은 서경(西京)에 이르러 안정역(安定驛)과 임원역(林原驛) 등의 백성을 도륙하고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로 들어갔다. 이에 정숙첨(鄭叔瞻)을 행영중군 원수(行營中軍元帥)에 임명하고 조충(趙冲)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에 개경 사람들을 뽑아서 종군할 만한 사람들은 모두 부오(部伍)3)군진(軍陣)의 대오를 말한다.에 소속시켰다. 이에 태조의 후예들과 문과 출신이 모두 예속되었고 또 승도를 뽑아 수만 명을 얻었다. 그런데 정숙첨 등이 군사를 점검해 보니 날쌔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인 사병이 되었으며, 관군은 오직 노약자뿐이었다. 12월에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러 평주(平州)【지금의 평산(平山)】의 병사들에게 적이 온다고 말하니 모두 달아나 군대가 무너지고 오직 조충만이 대오를 정돈하였다. 이윽고 적이 황주(黃州)를 도륙하고 염주(鹽州)【연안(延安)】와 백주(白州)【백천(白川)】에 이르니 정숙첨 등이 금교(金郊)【지금의 평산에 있다.】로 물러나 있다가 며칠 후에 다시 국청사(國淸寺)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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