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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戊寅) [고종 5년]

【송 영종 가정 11년 ○ 일황 순덕 8년 ○ 서력 기원 1218년】이었다.

가을 7월이었다. 이에 앞서 거란군[丹兵]이 제주(堤州)에서 패하여 돌아가서 여진(女眞)에게 구원병을 청하니 군세가 다시 진작되었다. 이에 관군을 연달아 무찌르고 양주(楊州)로 진격하여 압박하니 조충(趙冲)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고, 김취려(金就礪)를 병마사(兵馬使)로 삼아서 정통보(鄭通寶) 등과 함께 전후좌우 군(軍)을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왕이 친히 부월(鈇鉞)1)출전하는 장수에게 임금이 친히 내리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말한다.을 주고, 벼슬하지 않은 생도들도 모두 종군하게 하였다. 이때 조충이 전의 패배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겨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적을 토벌하니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였다. 적을 독산(禿山)【지금의 박천(博川)에 있다.】에서 연달아 패배시키니 적이 수만 기병을 이끌고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 지켰다.

○ 겨울 12월이었다. 처음에 김군수(金君綏)가 조충을 대신하여 서북 병마사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숙주(肅州)【지금의 숙천(肅川)】, 영청(永淸)【지금의 영유(永柔)】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4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 몽고(蒙古)가 원수 합진(哈眞)과 부원수(副元帥) 찰자(札刺)2)원문에는 공자(孔刺)로 되어 있으나, 찰자(札刺)로 바로잡는다.를 보내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동여진에서 보낸 완안자연(完顔子淵)의 군사 2만 명과 합하여 거란군을 공격한다고 하면서 화주(和州)【지금의 중화(中和)】, 맹주(猛州)【지금의 맹산(孟山)】, 순주(順州)【지금의 순천(順川)】, 덕주(德州)【지금의 덕천(德川)】의 네 성을 격파하고 강동성에 이르렀다.

○ 조충이 병사를 보내서 몽고군과 합세하였다. 이때에 몽고군이 이미 강동성으로 향하였는데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서 군량을 나르는 길이 이어지지 못하였다. 합진이 원수부에 문서를 보내 말하기를, “우리 황제께서 거란군이 귀국으로 도망간 지가 3년이 되었으나 깨끗이 없애지 못한 것을 보고 군사를 보내 토벌케 하였으니 귀국은 오직 군량을 돕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 황제께서 적을 격파한 후에 귀국과 형제의 의를 맺고자 한다.”고 하니,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허실을 몰래 살피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중군 판관(中軍判官) 김인경(金仁鏡)이 가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들으니 몽고군의 진법이 손자(孫子)와 오자(孫子)의 병법을 본받았다고 하니, 제가 가서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인경에게 정예 병사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미곡 1천 석을 갖다 주도록 주니, 합진이 크게 기뻐하며 연회를 베풀어 환대하였다. 김인경이 방진(方陣)을 펼치고 몽고 장수로 하여금 이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군대의 모습이 늠름하고 좌우 진퇴의 보벌(步伐)이 질서정연하므로 합진이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 조충과 김취려 등이 몽고군과 동여진군에 합세하여 강동성을 포위하였다(1219). 이때에 몽고와 동여진이 비록 우리나라를 구원한다고 칭하였지만 몽고는 가장 흉악하고 사나우며, 또 예전에 우리와 관계가 좋은 적이 없었으므로 안팎으로 인심이 매우 동요하였다. 조충만이 홀로 편안한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사정에 따라 임시변통으로 대처하였다. 합진이 또다시 군사를 추가로 보내기를 여러 차례 독촉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가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김취려가 말하기를, “국가의 이해가 바로 오늘에 달려 있고 또 일에 임하여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무이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가기를 청하였다. 지병마사(知兵馬事) 한광연(韓光衍)과 함께 10명의 장수, 신기군(神騎軍), 대각(大角), 내상(內廂)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합진을 만나러 갔다. 김취려가 신장이 9척이고, 수염이 멋있었다. 합진이 그 용모가 훌륭하고 또 언변이 뛰어났으므로 형제의 의를 맺으면서 김취려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섯 나라를 정벌하여 귀인을 여럿 만나보았으나, 형님과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고 예를 갖추어 대함이 매우 두터웠다. 며칠이 지나서 조충이 도착하니 합진이 또 형님으로 섬기고자 하여 주연을 베풀고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여러 군사가 강동성 아래에 모여서 사면을 포위하니 거란군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 최충헌(崔忠獻)에게 궤와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최충헌이 나이가 70세라고 거짓으로 고노(告老)3)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는 일을 말한다.하니, 왕이 그 뜻을 알고 유사(有司)에게 예의를 갖추어서 궤와 지팡이를 하사하도록 하고 정사를 나와서 보라고 하였다. 최충헌이 또한 그의 아들 최우(崔瑀)로 하여금 사병을 널리 모집하도록 할 때에 승려와 노비를 가리지 않고 모두 병졸에 속하도록 강제하였다. 이에 안팎으로 크게 동요하여 백성이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으며 심지어 땔감을 채취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 강동성을 빼앗으니 거란군이 평정되었다(1219). 적이 이미 포위되어 형세가 더욱 어려워지고 적의 우두머리 감사왕자(感捨王子)가 목매 죽으니 그의 장수와 병졸 남녀 5만여 명이 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조충 등이 합진과 함께 왕자의 가족과 위승상(僞丞相)⋅평장(平章) 이하 1백여 명의 목을 베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면하였다. 이에 합진이 조충과 함께 동맹을 맺으며 말하기를, “양국이 영원토록 형제의 의를 맺어서 만세가 되도록 서로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월에 합진이 병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조충이 거란[契丹]의 포로들을 각 도의 주현에 나누어 보내서 개간하지 않은 묵은 땅을 주어 모여 살게 하고 논밭을 나누어 줘서 농민이 되도록 하였다. 이때 동여진군이 또한 북쪽으로 돌아갈 적에 장수 완안자연이 조충의 사람됨을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조원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하늘이 고려(高麗)에 이 사람을 내려보낸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존경하였다.

○ 최충헌에게 성을 하사하여 왕씨(王氏)라고 하였다.

○ 최충헌이 죽었다. 최충헌이 병이 있어 왕에게 글을 올려 사직하고, 하사받은 성도 반환하고 내외 죄수들을 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충헌이 죽으니 모든 관리가 흰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하고 예식과 절차가 모두 왕의 그것을 모방하였다. 최충헌이 죽기 직전에 그의 아들 최우로 하여금 비상시를 대비하도록 하니, 이 때문에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으며 내외의 권력이 모두 최우에게 돌아갔다. 최충헌이 흉폭 잔학하여 권력을 잡은 지 24년 동안 위세와 권력이 대단하여 온 나라가 두려워하였다. 왕은 팔짱을 끼고 그저 명령만 들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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