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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辛卯) [고종 18년]

【송 이종 소정 4년 ○ 일황 후굴하 10년 ○ 서력 기원 1231년】이었다.

가을 8월에 몽고(蒙古)가 사신을 살해한 것을 원망하여 원수 살리타[撒禮塔]를 보내 함신진(咸新鎭)【지금의 의주(義州)에 있다.】을 공격하고 철주(鐵州)【지금의 철산(鐵山)】에 이르렀다. 낭장(郎將) 문대(文大)를 포로로 잡고 성 아래에 이르러서는 문대를 협박하여 철주 백성에게 항복을 권유하라고 하였다. 이에 문대가 크게 소리치며 말하기를, “가짜 몽고군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때에 동여진(東女眞)이 몽고인 복장을 하고 변방의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진짜 몽고군과 가짜 몽고군을 구별하는 일이 있었다. 몽고군이 문대의 목을 자르려다가 다시 소리치도록 하니, 문대가 또다시 전과 같이 “가짜 몽고군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몽고군이 문대를 죽이고 급히 성을 공격해서 무너뜨린 후 곧바로 도륙하였다.

○ 채송년(蔡松年)을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아서 몽고군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 몽고군이 귀주(龜州)【지금의 귀성(龜城)】를 공격하였는데, 병마사 박서(朴犀)와 장군 김경손(金慶孫) 등이 성을 견고히 지키니 몽고군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처음에 몽고군이 철주를 도륙하자 삭주 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靜州)【지금의 의주에 속해 있다,】 분도장군 김경손 및 정【정주】, 삭【삭주】, 위(渭州)【위원(渭原)】, 태(泰)【태천(泰川)】 등 여러 주 수령이 모두 귀주에 와서 모였다. 이때에 박서가 귀주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를 사방으로 나누어서 지키도록 하였다. 이윽고 몽고군이 이르러 남문을 공격하니, 김경손이 죽기를 각오한 12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싸웠다. 김경손이 날아오는 화살에 팔을 맞아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손수 북 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싸우기를 4~5합(合)만에 몽고군이 물러나 달아났다. 김경손이 대오를 정비하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니, 박서가 길가에서 맞이하여 절하고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성을 지키는 일을 모두 김경손에게 위임하였다. 이때에 몽고군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였는데, 처음에는 수레에 풀을 쌓아서 공격하므로 김경손이 포차(砲車)1)대포 등 화포를 끌고 다니는 수레이다.를 이용하여 쇠 녹인 물을 쏟아 부어 쌓여 있는 풀을 모두 태웠다. 몽고군이 다시 누거(樓車)2)망루를 설치하여 적의 성이나 진지를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수레이다.와 큰 상을 쇠가죽으로 씌우고 그 속에 군사를 숨겨 성 밑에 이르러 땅굴을 팠다. 이에 박서가 곧 성의 구멍에 쇠 녹인 물을 부어서 누거를 태웠다. 또 썩은 이엉을 불살라서 큰 상을 태우니 죽은 몽고군이 매우 많았고 모두 놀라 머뭇거리다가 흩어져 도망갔다. 또 몽고군이 수레 위에 풀을 싣고 불을 붙여 성루(城樓)를 공격하므로, 박서가 미리 물을 성루 위에 저장해 두었다가 쏟아 부으니 불이 곧 꺼졌다. 이때에 김경손은 호상(胡床, 중국식 의자)에 걸터앉아서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포환이 날아와 김경손의 정수리 뒤를 지나 옆 사람의 머리를 쳐서 부수었다. 그러나 김경손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얼굴색[神色] 또한 태연자약하였다. 몽고군이 성을 포위한 지 30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 몽고군이 선주(宣州)【선천(宣川)】, 곽주(郭州)【곽산(郭山)】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또한 용주(龍州)【지금의 용천(龍川)】를 포위하여 부사(副使) 위소(魏玿)를 포로로 잡았다. 겨울 10월에 평주(平州)【지금의 평산(平山)】에 통첩하여 말하기를, “우리 병사들이 함신진【의주에 있다.】에 이르렀을 때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았으니 너희 나라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항복하면 우리는 곧 동여진으로 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진짜 몽고군임을 알게 되었다.

○ 몽고군이 다시 귀주를 공격하니 박서가 힘써 싸워서 물리쳤다. 몽고군이 귀주 성곽 2백여 첩(堞)을 부수고 성을 넘어 들어오자 박서 등이 또 크게 물리쳤다.

○ 삼군(三軍)의 원수가 안북부(安北府)【지금의 안주(安州)】에서 몽고군과 싸우다가 무너졌다. 11월에 몽고군이 평주를 도륙하고 예성강(禮成江)【송도(松都)의 서남쪽에 있는 강】에 이르러 집을 불태우고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니 개경이 흉흉하였다. 최우(崔瑀)가 사병으로 자신을 호위하였으며,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늙고 약한 남녀뿐이었다.

○ 12월에 어사(御史) 민희(閔曦)를 몽고 진영으로 보내서 화친을 요청하였다. 몽고군이 개경의 네 문 밖에 나누어 주둔하고 또 흥왕사(興王寺)【지금의 풍덕(豊德)에 있다.】를 공격하였다. 이에 민희와 낭중(郎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 몽고군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노고를 위로하고 화해를 요청하여 몽고 사신 2명과 함께 돌아왔다. 종실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안북부에 보내서 항복하도록 설득하고 살리타에게 많은 토산물을 바쳤다.

○ 몽고군이 다시 귀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몽고군이 또다시 대포차(大砲車)를 가지고 귀주를 공격하니 박서가 또한 포차를 보내서 죽인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몽고군이 회안공의 문첩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박서가 듣지 않고 성을 지키기를 더욱 견고히 하였으며 몽고군을 크게 물리쳤다. 몽고군 가운데 한 노장이 성루에 있던 무기를 둘러보면서 탄식하기를, “내가 천하를 다녔어도 공격을 이와 같이 받고도 항복하지 않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성안의 여러 공(公) 은 언젠가 모두 장수와 재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조숙창(趙叔昌)이 몽고 사신과 함께 왔다. 조숙창은 조충(趙冲)의 아들이다. 그의 부친이 일찍이 몽고의 합진(哈眞)과 친구를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몽고 사신 9명과 함께 몽고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와서 사신을 살해한 일을 꾸짖었다. 또 2만 필의 말에 실을 수 있는 금, 은, 의복과 자줏빛 비단 1만 필, 수달 가죽 2만 영(領), 말 2만 필, 왕손과 종실의 어린 남녀 각 1천 명, 장군 및 대관의 어린 남녀 각 1천 명을 요구하였다. 그 나머지 요구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또 군사의 의복 1백만 벌을 요구하였다.

○ 조숙창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황금 70근과 백금 1천 2백 근, 동옷[襦衣, 남자가 입는 저고리] 1천 벌[領], 말 170필을 몽고의 진영에 보냈다. 또 사신을 죽인 일에 대해 변명하고 원수 이하 장수들에게 폐물을 바쳤다. 이때에 나라의 창고가 모두 비어서 모든 관료로 하여금 관품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의복을 바치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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