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2권)
  • 동국역사 권4(고려기(高麗紀))
  • 고종(高宗)
  • 임진(壬辰) [고종 19년]

임진(壬辰) [고종 19년]

【송 이종 소정 5년 ○ 일황 후굴하 11년 ○ 서력 기원 1232년】이었다.

봄 3월에 삼군이 몽고(蒙古) 진영에 가서 항복하니 몽고군이 돌아갔다.

○ 사신을 귀주(龜州)에 보내서 몽고에게 항복하도록 타일렀다. 조정(朝廷)1)원문에는 조연(朝延)으로 되어 있으나, 조정(朝廷)으로 바로잡는다.이 최임수(崔林壽)와 민희(閔曦) 등에게 몽고군을 따라 귀주에 가서 항복을 권유하도록 하였으나 박서가 따르지 않았다. 민희가 항복하지 않는 박서를 측은히 여기고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하니 박서가 어쩔 수 없이 항복하였다. 후에 몽고 사신이 그가 성을 견고하게 지킨 것에 분통해 하며 죽이고자 하였다. 최우(崔瑀)가 박서에게 말하기를, “경이 국가에 충절한 것은 매우 장하나 몽고인의 말 또한 두려워할 만하니 경은 스스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박서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후에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었다가 죽었다.

○ 자주(慈州)를 타일러서 몽고군에게 항복하라고 하니, 지키던 신하 최춘명(崔椿命)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처음에 몽고군이 자주를 공격하니 부사(副事) 최춘명이 견고히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살리타[撒禮塔]가 회안공(淮安公) 정(侹)과 함께 우리 관리 태집성(太集成), 그리고 몽고 관리를 성 아래에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였다. 최춘명이 이를 듣지 않고 좌우에 명하여 활을 마구 쏘도록 하니, 태집성이 원한을 품고 돌아가다가 이때에 이르러 최우에게 말하기를, “최춘명을 죽이지 않으면 몽고군의 화를 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우가 최춘명의 목을 베려고 할 때 최춘명이 처형에 임해서도 말과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몽고군이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우리에게는 맞지 않으나 귀국에는 충신이다.”라고 하고 풀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 몽고가 다루가치[達魯花赤] 70여 명을 개경과 부, 주, 현에 나누어 두고 나라를 감시하였다.

○ 6월에 최우가 전왕을 자연도(紫燕島)【지금의 인천(仁川)에 있다.】로 옮겼다.

○ 최우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하고 별초 지유(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을 죽였다. 최우가 몽고의 환란을 피하고자 강화로 천도하였다. 이때 나라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되어 성안에 호구(戶口)가 10만이고, 황금과 벽옥이 서로 마주하고 있어 모두 옮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별초 지유 김세충이 최우를 힐난하며 말하기를, “개경의 성과 주변 못이 견고하고 병력이 충분하므로 마땅히 죽을 힘을 다해 사직을 보위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가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최우가 김세충의 목을 베고 왕을 협박하여 강화로 가고자 하니 왕이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가 이에 앞서 자신의 재물들을 강화로 옮겨 보내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성안 5부(部) 사람들을 보냈다. 또 강화에 궁궐을 짓게 하였으며, 가을 7월에 왕이 강화에 이르러 객관에 머물렀다.

○ 여러 도회에 명을 내려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옮겨 가게 하였다. 이때에 나라에서 북쪽 경계의 여러 성에 있던 다루가치의 활과 화살을 빼앗으니, 이는 몽고군이 다시 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세조(世祖)【태조(太祖)의 아버지 융(隆)이다.】와 태조의 두 자궁[梓宮]2)왕, 왕대비, 왕비 등의 시신을 넣은 관이다.을 강화로 이장하였다.

○ 9월에 몽고가 다시 대거 쳐들어왔다. 몽고군이 우리나라가 다루가치 등을 붙잡아 욕 보이고 강화로 천도하였다고 하여 다시 살리타를 보내서 쳐들어왔다. 가는 곳마다 죽이고 약탈하여 비록 부녀자나 노약자라도 모두 죽였다. 겨울 12월에 처인성(處仁城)【지금의 용인(龍仁)에 있다.】을 공격했는데, 한 승려가 성안에서 살리타에게 활을 쏘아서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몽고군이 마침내 무너져 흩어지고 그 부장(副將)이 군사를 돌렸으나, 남은 병사가 여전히 많아 약탈이 그치지 않았다. 나라에서 그 승려에게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였으나 승려가 공을 숨기며 굳이 사양하였다. 후에 환속(還俗)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김윤후(金允侯)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