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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庚午) [원종 11년]

【송 도종 함순 6년 ○ 일황 귀산 11년 ○ 서력 기원 1270년】이었다.

봄 2월에 왕이 몽고(蒙古)의 수도에 가서 몽고 공주를 태자에게 시집 보내 줄 것을 청하고 또 우리나라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둘 것을 청하니, 몽고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 이에 앞서 몽고가 폐위 사건을 꾸짖어 물으니, 안경공(安慶公) 창(淐)이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서 변명하였다. 그때에 서경 병마 영리(西京兵馬營吏) 최탄(崔坦)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임연(林衍)을 죽이겠다고 말하고 몽고에 군사 3천 명을 청하여 서경을 진압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몽고 황제가 몽가독(蒙哥篤)을 보내 병사들을 거느리고 김방경과 함께 서경에 이르렀다. 최탄 등이 몽고군의 세력을 믿고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므로 김방경이 힘을 다해 이를 막아서 드디어 무사하였다.

○ 몽고가 임연에게 폐위 사건을 계속해서 문책하니, 임연이 근심하다가 병에 걸려서 죽었다.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이어 받았다.

○ 여름 5월에 몽고가 행성(行省)을 우리나라에 설치하고 탈타아(脫朶兒)를 다루가치로 삼아 우리나라의 일을 다스리게 했다.

○ 이때에 왕이 몽고에 있으면서 나라 안의 신하들에게 강도에서 나와서 옛 도읍으로 옮기라는 유지를 내렸다. 임유무가 명을 어기고 따르지 않으니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지문하성(知門下省) 송송례(宋松禮) 등이 별초군을 이끌고 임유무를 죽이고 정사를 왕실로 돌아가게 하였다. 얼마 후 왕이 돌아와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 겨울 12월에 김방경이 진도(珍島)에서 삼별초(三別抄)를 공격하다가 불리해졌다. 처음에 최우(崔瑀)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용감한 병사들로 하여금 매일 밤 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름을 야별초(夜別抄)라고 하였다. 여러 도에서 도적들이 일어나자 별초군을 나눠 보내서 토벌하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아서 결국 좌⋅우군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또 우리나라 사람으로 몽고로부터 도망쳐 돌아온 자로써 하나의 부(部)를 별도로 두었으니 이것이 곧 삼별초이다. 이후 권신이 권력을 잡으면 자신의 수하로 삼았으므로 이들 무리가 사납고 다루기가 어려웠다. 왕이 옛 도읍으로 환도하여 곧 이를 혁파하니 군사들이 위기를 느끼고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드디어 그 병사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협박하여 왕으로 삼고 공사 재물과 자녀를 모두 약탈하여 취하였다. 또 바다로 나가 남쪽으로 가서 진도를 근거지로 삼고 주현(州縣)을 침범해 약탈하였다. 추토사(追討使) 신사전(申思佺)이 패하여 돌아오므로 이에 김방경으로 하여금 군사 6천여 명을 거느리고,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바다 한가운데서 적을 만나 김방경이 돌격하다가 포위되어 상황이 급박해졌다. 김방경이 “의로운 사람은 적에게 죽지 않는다.”고 하며 바다로 몸을 던지려고 하니, 그의 병사들이 다투어 구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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