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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己卯) [충렬왕 5년]

【송 제병(帝昺) 상흥(祥興) 2년, 이 해에 송나라가 멸망하였다. ○ 일황 후우다 5년 ○ 서력 기원 1279년】이었다.

봄 2월에 전국에 명을 내려 모두 원(元)나라 옷을 입도록 하였다. 처음 원종(元宗) 때에 장군 인공수(印公秀)가 왕에게 원나라 복장을 본받도록 권유하였으나 원종이 말하기를, “내가 조종의 가풍(家風)을 갑자기 바꾸기가 어려우니, 내가 죽은 뒤에 경(卿) 등이 알아서 하라.”고 하였다. 왕이 공주를 맞이할 때에 재상 송송례(宋松禮) 등이 왕의 뜻을 받들어서 머리를 자르고 조정에 나아갔으나 몇 사람밖에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관료 이하 궁궐 안, 학관(學館)에 명하여 모두 머리를 자르도록 하였다. 오직 백성과 노예들만이 예전 것을 따랐다.

○ 여름 4월에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을 대청도(大靑島)【지금의 장연(長淵)에 있다.】로 유배 보냈다. 이에 앞서 장군 위득유(韋得儒) 등이 김방경과 사이가 벌어져서 원나라 흔도(忻都)에게 헐뜯어 말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과 사위, 장군 나유(羅裕) 등 4백여 명과 함께 왕과 공주 및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다시강화(江華)에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고 하였다. 흔도가 곧 개경[京城]으로 들어가서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와 함께 왕 및 공주에게 고하고 김방경 등을 국문하였다. 일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왕이 그를 풀어 주었다. 이에 앞서 원나라 홍다구(洪茶丘)가 우리나라를 원망하여 틈을 엿보아 나라에 화를 미치고자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원나라 황제가 흔도와 홍다구에게 함께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홍다구가 쇠사슬을 김방경의 머리에 감고 곤장을 치는 사람에게 그의 머리를 치도록 하고, 옷을 벗긴 채 하루 종일 세워 두었다.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워서 김방경의 살과 피부가 얼어서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왕이 홍다구에게 이르기를, “앞서 흔도가 이미 국문하였는데, 어찌 다시 국문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홍다구가 말을 듣지 않고 매우 참혹하게 형벌을 더욱 가하였다. 김방경이 혼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나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왕은 김방경이 죽을까 두려워서 그를 몰래 설득하기를, 거짓으로 죄를 인정하고 추후에 억울함을 밝히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신의 간과 뇌가 길바닥을 덮을지라도 어찌 거짓으로 죄를 인정하여 사직을 저버리겠습니까?”라고 하며 홍다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를 죽이려거든 빨리 죽여라. 내가 어찌 불의에 굴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청도로 유배되었다.

○ 가을 7월이었다. 이에 앞서 왕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종행도감(從行都監) 김주정(金周鼎)이 원나라 황제에게 우리나라에 다루가치를 두는 것과 왕경에 주둔하고 있는 진(鎭) 등 몇 가지 일을 없애 줄 것을 청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이를 모두 들어 주고 김방경을 풀어 주었다.

○ 왕이 음악과 여색에 빠져서 교방(敎坊)의 재인(才人)을 늘리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여러 지방에 나누어 보내 창기(娼妓)를 선발하여 궁 안에 두고 단장을 새로 하게 하고 음란한 가사로 된 요염한 노래를 가르쳤다. 밤낮으로 노래와 춤을 멋대로 하며 즐기니, 이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때 윤수(尹秀)와 이정(李貞) 등은 매와 사냥개로 총애를 받았고, 오기(吳祁)와 석천보(石天補) 등은 노래와 여색으로 승진하였다. 그 나머지 송방영(宋邦英) 등은 모두 아첨하고 뇌물을 바쳐서 군소배가 섞여서 승진하니 왕의 마음이 더욱 방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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