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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辛卯) [충렬왕 17년]

【원 세조 지원 28년 ○ 일황 복견(伏見) 4년 ○ 서력 기원 1291년】이었다.

왕이 합단(哈丹)의 군사를 피해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그 전해 12월에 합단【원(元)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도적】군 수만 명이 화(和)【삼화(三和)】와 등(登)【삼등(三登)】 두 주(州)를 함락하고 사람들을 죽여서 양식으로 삼았다. 원나라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闍干)과 도첩목아(闍帖木兒), 그리고 우승(右丞) 탑출(塔出) 등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1만 3천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왕이 군사를 피해서 강화로 옮기니, 왕경 유수(王京留守) 송진(宋珍)과 서경 유수(西京留守) 정인경(鄭仁卿)은 성을 버리고 강화로 도망갔다. 적이 양근성(楊根城)으로 나아가 함락시키니 주현(州縣)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흩어져 도망갔다. 적이 철령(鐵嶺)을 넘어서 원주(原州)를 침범하자 별초 향공 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이 적을 맞아 싸웠는데 열 번 싸워 모두 이기니 적의 세력이 점차 꺾였다. 이때에 원나라 설도간이 와 지원하여 목천(木川)에서 연합하여 연기산(燕岐山) 아래에 이르니, 적이 숲 속에 매복해 있다가 우리 군사들에게 활을 쏘았다. 이때 우군 만호(右軍萬戶) 김흔(金忻)이 보병 5백 명을 이끌고 맨 먼저 올라가서 물리치고 여러 병사가 계속해서 진격하니 적의 세력이 약해져 흩어져 도망갔다. 이에 공주(公州)까지 추격하니 널린 시체가 30리에 달했다. 얼마 후 적의 나머지 무리가 다시 와서 공격하자 좌군 만호(左軍萬戶) 한희유(韓希愈)가 적의 진지로 달려 들어가 용사의 목을 베어 장대에 걸어 나오니 적이 모두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더욱 힘을 내서 공격해 크게 물리치니 합단이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 탐라(耽羅) 왕자에게 붉은 가죽 띠와 상아로 만든 홀(笏)1)관리가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이다., 모자, 가죽 신발을 하사하였다. 이에 앞서 원나라가 탐라를 취하여 속지(屬地)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서 왕이 그 땅을 돌려받았으므로 이러한 하사품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해에 탐라를 다시 ‘제주(濟州)’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가 탐라의 말을 가져가는 것은 끊이지 않았다.

○ 김방경(金方慶)에게 작위를 내려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임명하였다.

○ 11월에 왕이 공주와 함께 원나라에 갈 적에 세자는 원나라에 있었다. 백마 84필을 선물로 바치고 진왕(晉王) 감마랄(甘麻剌)의 딸 보탑실련(寶塔實憐)2)원문에는 보탑보련(寶塔寶憐)으로 되어 있으나, 보탑실련(寶塔實憐)으로 바로잡는다.공주를 아내로 맞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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