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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壬寅) [공민왕 11년]

【원 순제 지정 22년 ○ 일황 후촌상 24년 ○ 서력 기원 1362년】이었다.

봄 정월에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과 도원수(都元帥) 안우(安祐) 등이 홍건적[紅賊]을 크게 물리치고 도성을 수복하였다. 적이 이미 도성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안우, 최영(崔瑩) 등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동쪽 교외에 주둔하고, 정세운은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나아가 포위하였다. 이때 영해(寧海) 사람 박강(朴强)이 성문을 지키던 적을 베어 죽이자 여러 장수가 재빠르게 들어갔다. 태조(太祖)께서 휘하의 친병(親兵) 2천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크게 물리쳐서 적 10여만 명의 목을 베었다. 적의 우두머리 하유(河劉)와 관선생(關先生) 등이 모두 죽고 나머지 무리 파두번(破頭潘) 등 10여만 명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도망갔다.

○ 김용(金鏞)이 아첨하여 왕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정세운을 시기하고 미워하였으며, 또 안우,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등이 공을 세운 것을 싫어하였다. 이에 왕의 뜻이라고 속여서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였다. 또 그 모의가 누설될까 두려워서 드디어 왕에게 고하기를, “안우 등이 주장(主將)을 멋대로 죽였으니 이는 왕을 업신여긴 것입니다.”라고 하고 곧 안우 등을 모두 죽였다. 이때에 안우와 이방실의 아들은 나이가 모두 10여 세로 길거리를 떠돌았다. 백성이 다투어 음식을 가져다 주며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들이 편안해진 것은 모두 세 원수의 공 덕분이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 가을 7월에 태조께서 원(元)나라 승상(丞相) 납합출(納哈出)을 함흥(咸興)과 홍원(洪原) 등지에서 크게 물리치셨다. 납합출이 중원(中原)의 난을 틈타 심양(瀋陽) 등지를 점거하고 있을 때, 쌍성(雙城)【지금의 함흥】의 적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卓都卿) 등이 쌍성을 이미 잃었는데 우리나라를 매우 원망하고 있다가 납합출을 이끌고 동북 지방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왕이 태조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하여 나아가 방어하라고 하였다. 이때 납합출은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조소생, 탁도경 등과 함께 홍원에 주둔하였다. 적의 날랜 장수 한 명이 철갑을 입고 창을 휘두르니, 무리 가운데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께서 그와 함께 싸움을 하시다가 거짓으로 패한 척 도망하시니 그 장수가 더욱 분발하며 전진하여 급하게 창을 찌르려 하였다. 태조께서 몸을 돌려 말 옆구리에 착 달라붙으니, 그 장수가 태조를 치지 못하고 창을 따라서 넘어졌다. 태조께서 곧바로 활을 쏘아 죽이니 적들이 크게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갔다. 태조께서 추격하시다가 해가 저문 후에 돌아오셨다. 이때 납합출의 아내가 납합출에게 말하기를, “공이 천하를 두루 다녔으나 이와 같은 장군을 어찌 보았겠습니까? 마땅히 신속하게 피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납합출이 듣지 않고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태조께서 적의 장수를 여러 명 죽이시고 기습부대[奇兵]를 매복시켰다가 크게 물리치셨다. 납합출이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도망가니, 이때부터 동북 변방이 모두 평안하였다.

○ 8월에 왕이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 탐라 목호(耽羅牧胡) 고독불화(古禿不花) 등이 성주(星主) 고복수(高福壽)를 내세워 반역을 하고 원나라에 붙었다.

○ 겨울 10월이었다. 처음에 원나라 황후 기씨(奇氏)가 기철(奇轍) 등을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다.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황후의 뜻을 받들어 원나라 황제에게 왕을 무고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덕흥군(德興君) 혜(譓)를 고려(高麗) 왕으로 삼으니 혜는 충선왕(忠宣王)의 아들이다. 이때 최유가 좌정승(左政丞)이 되고 원나라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거짓 관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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