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2권)
  • 동국역사 권5(고려기(高麗紀))
  • 공민왕(恭愍王)
  • 정미(丁未) [공민왕 16년]

정미(丁未) [공민왕 16년]

【원 순제 지정 27년 ○ 일황 후촌상 29년 ○ 서력 기원 1367년】이었다.

봄 2월에 원(元)나라가 고대비(高大悲)를 보내 왔다. 당시 원나라 황제가 제주(濟州)로 피난 가려고 어부(御府)의 금과 비단을 실어 보내고, 제주를 다시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 승려 선현(禪顯)를 왕사(王師)로 삼으니, 선현은 신돈(辛旽)과 비견될 만하다. 왕이 강안전(康安殿)으로 불러서 만날 때에 왕이 아홉 번 절하니 선현은 서서 절을 받았다. 백관이 조복(朝服)을 입고 치하하였으며, 신돈은 혼자 융복(戎服, 무신이 입는 군복)을 입고 전각 위에 서 있었다.

○ 가을 7월에 전 첨의 정승(僉議政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이 죽었다. 이제현은 타고난 자질이 점잖고 너그러웠으며, 또 학문의 깊이가 심오하여 의논이나 시행된 사업이 내놓은 것들이 모두 빛나서 볼만하였다.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에 당황한 빛을 보인 적이 없었고, 또 허심탄회하게 아랫사람을 대해, 다른 사람의 일은 비록 사소한 선행이라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스스로 ‘익재(益齋)’라 칭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여 노소, 귀천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익재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저술한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이 있으니, 고려(高麗) 이래로 김부식(金富軾)과 이규보(李奎報) 등이 모두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이제현을 제일로 삼았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 겨울 10월에 전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과 지첨의(知僉議) 오인택(吳仁澤), 삼사사(三司使) 안우경(安遇慶) 등이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모두 장형(杖刑)을 받고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 12월에 이색(李穡)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박사(博士)로 삼았다. 이색이 생원(生員)의 수를 늘릴 때 정몽주와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을 선발하여 모두 다른 관직과 함께 교관(敎官)을 겸하게 하였다.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경업(經業)을 나누어 가르치고 강론을 마친 후에 서로 토론하니 이에 학도들이 몰려들어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학자들이 배우는 경서(經書)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오직 『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다. 정몽주가 강론할 때 새로운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많아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아해 하였는데,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보니 그 의미가 모두 들어맞았다. 이색이 매우 칭찬하며 말하기를, “달가(達可)【정몽주의 자(字)이다.】의 논의는 세우는 주장이나 지키는 주장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신돈이 전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 서녕군(瑞寧君) 유숙(柳淑)을 죽였다. 이때 신돈은 유숙이 비록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왕이 다시 등용할까 두려워하여 왕에게 참소하기를, “유숙이 매번 왕을 구천(句踐)에 비유하고 자신은 범려(范蠡)에 비유하니, 유숙이 만일 범려를 본받아서 배를 타고 떠난다면 반드시 연경(燕京)으로 가서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려 할 것이니 미리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명령하여 장형을 내린 뒤 유배를 보내도록 하였지만, 신돈이 곧 사람을 보내 그를 잡아 죽였다. 유숙이 충의와 절개가 있었고, 일에 임하여 정책을 결정할 때 식견이 탁월하였는데, 죽음에 임해서도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시호는 문희(文僖)라 하였다.

○ 성균관 제주(祭酒) 김문현(金文鉉)이 자신의 아버지 김달상(金達祥)을 죽였다. 김문현이 음란하고 행실이 무도하여 자기 형의 첩과 사통(私通)하자, 김달상이 법사(法司)에서 조사하여 다스릴까 두려워 신돈에게 청하기를, “김문현이 어리석으니 밖으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신돈이 그 죄를 물으니 김달상이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워 다만 말하기를, “미쳐서 정신이 이상합니다.”라고 하였다. 김문현이 이를 듣고 원한을 품어 신돈에게 말하기를, “저의 아버지가 공의 부덕을 논하며 말하기를,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신돈이 노하여 김달상을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죽였다. 김문현은 신돈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경을 함락하니, 원나라 황제가 북쪽 사막으로 도망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