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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辛亥) [공민왕 20년]

【명 태조 홍무 4년 ○ 일황 장경 4년 ○ 서력 기원 1371년】이었다.

봄 2월에 여진 천호(女眞千戶) 이두란(李豆蘭)이 귀화하니, 이두란의 본래 성은 동(佟)이었다.

○ 여름 5월에 전 장사(長沙)【지금의 무장(茂長)】 감무(監務) 이존오(李存吾)가 죽었다. 이존오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소박하고 신중했다. 일찍 고아가 되어 학문에 힘써서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교우가 좋았는데, 좌천된 이후로 공주(公州) 석탄(石灘)에서 살았다. 신돈(辛旽)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울분을 토하다가 병이 들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좌우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도 강한가?”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러하다.”고 하니 다시 누워서 말하기를,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다가 죽으니 나이가 31세였다. 그 후 신돈이 처형을 당하자 왕이 이존오의 충성을 생각하여 대사성(大司成) 벼슬을 추증하였다.

○ 가을 7월에 신돈이 처형되었다. 이때 신돈이 위엄을 보이거나 은혜를 베푸는 일을 제멋대로 하니 왕 또한 편안치 못하였다. 왕의 성격이 시기를 잘하여 비록 심복 대신이라고 하더라도 권세가 강해지면 반드시 죽였다. 신돈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반역을 도모하고, 그 무리와 함께 거사 날짜를 정하였다. 그의 문객 시랑(侍郞) 이인(李韌)이 왕에게 알리자, 왕이 그 무리 기현(奇顯)과 최사원(崔思遠) 등을 죽이고 신돈을 수원부(水原府)에 유배 보냈다가 죽여서 도성에 효시(梟示)하였다. 그의 2세 된 아들도 함께 죽였으며 경복흥(慶復興) 등을 소환하였다.

○ 이색(李穡)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고 근신들에게 말하기를, “문무 양 대관(大官)이 모두 최고이다.”라고 하니, 이는 이색과 우리 태조(太祖)를 가리킨 것이다.

○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나이 어린 미소년을 뽑아 소속시키고, 대언(代言) 김경흥(金慶興)에게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홍륜(洪倫), 한안(韓安), 권진(權瑨), 노선(盧瑄) 등이 모두 총애를 받아 침실 내에서 항상 시중을 들었다. 또 아름답고 건장한 자들을 많이 뽑아 궁궐에 항상 두고 그들을 ‘동고적(東古赤)’이라고 부르며 자제위와 함께 같이 총애하였다.

○ 우(禑)를 봉하여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1)원문에는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되어 있으나,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바로잡는다.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신돈이 유배 갔을 때에 왕이 시종 들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서 한 여종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모니노(牟尼奴)2)원문에는 모리노(牟利奴)로 되어 있으나, 모니노(牟尼奴)로 바로잡는다.라 하니 잘 보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후전(太后殿)으로 불러들여 양육하면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있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름을 ‘우’라고 고치고, 유신(儒臣) 백문보(白文寶)와 전녹생(田祿生), 정추(鄭樞) 등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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