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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庚午) [공양왕 2년]

【명 태조 홍무 23년 ○ 일황 후소송 8년 ○ 서력 기원 1390년】이었다.

봄 정월에 우리 태조(太祖)로 하여금 팔도의 군마(軍馬)를 지휘하고 군영(軍營)을 설치하여 번(番)을 나누어 번갈아 가며 숙직하게 하였다.

○ 3월에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가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길재는 해평(海平)【지금의 선산(善山)】 사람이다. 성리학[理學]을 공부하여 정몽주(鄭夢周)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폐왕 우(禑) 시절에 주서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노모(老母)를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선산으로 돌아갔다.

○ 이색(李穡) 등을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처음에 조민수(曺敏修)1)원문에는 조민수(曹敏修)로 되어 있으나, 조민수(曺敏修)로 바로잡는다.가 창녕(昌寧)에 유배 가 있었는데, 규정(糾正), 전시(田時) 등을 보내서 창(昌)왕을 세운 일을 국문하였다. 또 전시를 장단(長湍)에 보내어 이색을 국문할 때 옥졸로 하여금 좌우에서 곤장을 잡고 매질하며 밤낮으로 핍박하면서 또 조민수의 자백서를 보여 주었다. 이색이 거짓으로 자백하며 말하기를, “창을 세울 때 조민수가 주장(主將)이 되었으므로 내가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나 멋대로 왕을 세우는 데 앞장선 것은 내 본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관(臺官)이 다시 두 사람의 죄를 논하고 또 이임(李琳), 이귀생(李貴生), 이을진(李乙珍), 정지(鄭地), 우인열(禹仁烈), 이경도(李庚道), 왕안덕(王安德), 우홍수(禹洪壽), 원상(元庠)이 우의 무리가 된 죄를 묻기를 청하였다. 왕이 우리 태조와 심덕부(沈德符)에게 명하기를, “조민수는 이미 죄를 받았으니 경 등이 대관들을 설득하여 다시는 논의치 말게 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색을 함창(咸昌)에 유배하고 이림과 이귀생 등 아홉 명도 죄를 물어 유배 보냈다.

○ 윤 3월에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청주(淸州)에 유배 보냈다. 처음에 대간이 이색의 죄를 논하니 이행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대간이 죄를 논하는 것이 어찌 공신의 뜻이 아니리오?”라고 하였다. 우리 태조와 공신 등이 글을 올려서 시비를 명확히 하고, 이행을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며 비방을 중지하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정사를 돌보라.”고 명하고 이행을 유배 보냈다.

○ 정도전(鄭道傳)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김사형(金士衡)을 밀직사(密直使)에, 우리 태종(太宗)을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하였다. 태종은 우리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영리하고 재주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고려(高麗)의 정치가 어지러워 민심이 떠난 것을 근심하여 의기롭게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셨다.

○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서운관이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있는 지리(地理)의 흥망성쇠에 관한 글을 올려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

○ 겨울 11월에 우리 태조를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임명하고, 정몽주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하였으며, 지용기(池湧奇)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하였다.

○ 서경 천호(西京千戶) 윤귀택(尹龜澤)이 우리 태조께 고하기를, “김종연(金宗衍)이 심덕부, 지용기(池湧奇), 박위(朴葳)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공을 해칠 모의를 하면서 심덕부가 조유(趙裕)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심덕부에게 말하시니, 심덕부가 조유를 하옥하여 대면해서 옳고 그름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태조께서 왕께 아뢰시기를, “심덕부는 신과 함께 서로 시기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니, 청컨대 이를 묻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조유를 풀어 주었는데 이때 헌부(憲府)가 소를 올려 다투므로 마침내 조유를 목매어 죽이고 심덕부 등을 유배 보냈으며 김종연은 사지를 찢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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