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2권)
  • 동국역사 권5(고려기(高麗紀))
  • 공양왕(恭讓王)
  • 신미(辛未) [공양왕 3년]

신미(辛未) [공양왕 3년]

【명 태조 홍무 24년 ○ 일황 후소송 9년 ○ 서력 기원 1391년】이었다.

봄 정월에 우리 태조(太祖)를 삼군 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에 임명하고, 배극렴(裵克廉)1)원문에는 배극렴(裴克廉)으로 되어 있으나, 배극렴(裵克廉)으로 바로잡는다.,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2)원문에는 정도부(鄭道傅)로 되어 있으나, 정도전(鄭道傳)으로 바로잡는다.은 중좌우군 총제사(中左右軍摠制使)에 임명하였다.

○ 2월이었다. 왕익부(王益富)라는 자가 있었는데, 지용기(池湧奇) 아내의 친족이었다. 지용기의 집에 출입하면서 스스로 “충선왕(忠宣王)의 증손이다.”라고 하였다. 그를 잡아서 심문하여 목매어 죽이고 아울러 지용기는 유배 보냈다.

○ 왕이 옛 수도로 돌아오니, 형조 판서(刑曹判書) 안원(安瑗)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급전법(給田法)을 정할 때에 문종(文宗)의 옛 제도에 의거하여 과전(科田)을 경기에 설치하고 각각 과에 따라서 받게 하였다. 제1과는 대군(大君)에서부터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150결(結)을 주었고, 그 아래는 점차 조금씩 줄여서 18과에 이르렀다. 무릇 전조(田租)가 매번 수전(水田) 1결에는 조미(糙米)3)벼를 겉만 벗기고 속 겨는 벗기지 않은 쌀이다.가 30말[斗]이고, 한전(旱田)은 1결에 잡곡 30말이었다. 이외에 함부로 거두어 들이는 것은 훔친 것으로 논하였다.【결이란 글자는 고려(高麗) 때 새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니, 곧 옛날의 1경(頃)이다】

○ 가을 7월에 섬라국(暹羅國)4)샴(Siam)의 발음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지금의 태국이다.이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5)외국의 사신 등이 예물을 가지고 오는 것을 말한다.하였다. 섬라는 중국 남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어서 우리와 교류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 나라의 왕이 나공(奈工) 등 8명을 보내어 서신을 전하고 방물을 바쳤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상의를 벗고 어떤 사람은 맨발이었으며, 높은 사람은 흰 천으로 머리를 가렸다. 따르던 시종이 높은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 보였다. 세 번 통역을 거친 뒤에야 그 뜻을 전할 수 있었다.

○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다만 탄핵을 일삼아 화가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곧 배극렴6)원문에는 배극렴(裴克廉)으로 되어 있으나, 배극렴(裵克廉)으로 바로잡는다. 등과 함께 창(昌)을 세우고 우(禑)를 영입한 것 등 5가지 죄의 경중을 나누어 정했다. 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 다시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誣告)로 죄를 논하소서.”라고 하였다.

○ 8월에 일본 미나모토 료순[源了俊]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붙잡힌 포로를 돌려보냈다.

○ 9월에 우리 태조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하고 심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였다.

○ 성헌(省憲)과 형조(刑曹)가 글을 올려 “정도전7)원문에는 정도부(鄭道傅)로 되어 있으나, 정도전(鄭道傳)으로 바로잡는다.이 간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충직한 체하여 국정을 오염시키니 극형에 처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공신이라 하여 용서하고 향리로 내쫓았다.

○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가 왕에게 아뢰기를, “은과 동이 본래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은병(銀甁) 화폐를 다시 발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땅히 고금을 참작하여 우리나라에서 통용될 저화(楮貨)를 만들어 인쇄한 후 유포하여 오종포(五綜布)와 같이 사용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 이색(李穡)과 이숭인(李崇仁)을 불러들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