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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壬申) [공양왕 4년]

【명 태조 홍무 25년 이 해에 고려가 망함 ○ 일황 후소송 10년 ○ 서력 기원 1392년】이었다.

여름 4월에 조영규(趙英珪)가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처음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정몽주의 재주를 중하게 여기시어 천거하여 발탁하셨다. 정몽주 또한 태조의 업적을 깊이 받들어서 시를 읊을 때 이를 묘사하였다. 무진(戊辰, 1388)년 왕을 폐위한 후부터 정몽주가 비로소 태조를 도모하려는 뜻이 있어 우(禑)를 맞아들이고 창(昌)을 왕으로 세운 것 등 5가지 죄를 정하여 탄핵을 억제하면서 왕으로 하여금 옛 사람을 맞아들여 등용하라고 하였다. 또 김진양(金震陽) 등을 추천하여 간(諫)하는 직에 배치하였다. 마침 태조께서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자, 정몽주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김진양 등에게 먼저 태조의 측근들을 제거하라고 하였다. 이때 김진양이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 등과 함께 상소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趙浚), 전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 전 판서(判書) 윤소종(尹紹宗), 전 판사(判事) 남재(南在), 청주목(淸州牧) 조박(趙璞) 등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에 왕이 조준 등 여섯 명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냈다. 또 김구련(金龜聯), 이번(李幡) 등을 유배지에 나누어 보내서 장차 국문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께서 벽란도(碧瀾渡)【지금의 송도(松都)에 있다.】에서 돌아오시니 태종(太宗)이 재빨리 나가 맞이하시고 본가로 급히 돌아가서 정몽주를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태조의 형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정몽주에게 알렸다. 정몽주가 일이 성공할 수 없음을 알고 태조의 집에 이르러 문병을 칭하고 사태를 살피니, 태조의 접대에 변함이 없었다. 이에 조영규 등이 정몽주가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길에서 쳐 죽였다. 정몽주의 사람됨이 호방하고 뛰어났으며 충효와 절개가 높았고,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아 사람의 천성과 천명의 심오한 이치를 깨달았다. 당시에 나라에 변고가 많아서 기무(機務)1)밖으로 드러내지 않게 비밀을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일을 말한다.가 크고 번거롭게 많았으나, 정몽주는 목소리와 얼굴색에 변함이 없이 응대하여도 처리하는 일이 모두 적합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왕을 보좌할 인재다.”라고 칭하였다. 나랏일이 더욱 힘들어졌으나 의기 있게 나라를 지키고 편안하게 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한 승려가 대문에 들어서서 시(詩)를 바치며 그의 죽음을 미리 알려 주니, 정몽주가 시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호라! 늦었도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나이가 57세였다. 후에 우리 조정에서 시호를 내렸으며 문묘(文廟)에서 제사를 지냈다. 지은 시문이 호방하면서 엄숙하고 정결하였으며, 『포은집(圃隱集)』이 있어 세상에 전하였다.

○ 정몽주가 죽자 우리 태종이 고려(高麗) 왕에게 아뢰어 김진양을 국문하게 하였다. 이때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 이숭인(李崇仁), 이종학(李種學), 조호(趙瑚) 등이 연루되었다. 이에 먼저 김진양, 이숭인, 이종학, 서견(徐甄), 권홍(權弘) 등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냈다. 김진양의 사람됨이 강개하고 소인배와 어울리지 않았으며, 글을 잘 지었다. 정도전과 함께 이색을 스승으로 섬길 때 재주와 명성이 정도전보다 뛰어났다. 정도전이 그를 미워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을 사주하여 때려 죽였다. 이종학은 이색의 둘째 아들로 장사(長沙)【지금의 무장(茂長)】에 유배 갔다가 또한 정도전에게 목을 졸려 죽었다.

○ 왕이 이색을 청주(淸州)로 추방하였다. 왕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경의 아들이 이미 조정에서 죄를 얻었으니 경은 떠나라. 그러나 강을 두 개 건너서는 오직 경의 뜻에 따라가라.”고 하였다. 이색이 대답하기를 “신이 논밭과 집이 없으니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심덕부(沈德符)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하고 우리 태조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였다.

○ 6월에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우현보와 종실 남평군(南平君) 화(和), 전 절제사(節制使) 왕승귀(王承貴) 등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고 정도전과 남은 등을 소환하였다. 우현보의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후덕하여 관직에 있을 때 청렴결백하였다. 아들 우홍수(禹洪壽) 등 다섯 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손자 우성범(禹成範)이 왕의 딸을 배필로 맞았는데, 윤소종 등이 그의 집안이 대단한 것을 꺼려 제거하고자 하였다. 우현보는 정몽주 등과 함께 왕실을 도우려고 하였는데, 정몽주가 죽어 시신이 길가에 놓여 있어도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자 승려에게 몰래 이야기하여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중국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국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불러서 공신의 작호를 내렸으나 받지 않고 죽었다.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우홍수 등은 정도전이 미천한 것을 멸시하여 그의 고신(告身,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정도전이 깊이 원망하다가 혁명 시에 죄를 억지로 씌워서 사사로이 죽였다.

○ 조준을 경기 좌우도 절제사(京畿左右道節制使)에 임명하고, 남은을 경상도 절제사(慶尙道節制使)에 임명하여 각각 그 도의 병마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 가을 7월에 정도전을 봉화군(奉化郡) 충의군(忠義君)에 임명하였다.

○ 왕이 원주(原州)에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때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하니, 대중이 한마음으로 추대하여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따르는 바가 있으니 어찌 나아가 왕위에 오르시지[勸進]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12일 신묘(辛卯)에 우시중(右侍中) 배극렴(裵克廉)2)원문에는 배극렴(裴克廉)으로 되어 있으나, 배극렴(裵克廉)으로 바로잡는다. 등이 왕대비 안씨(安氏)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왕이 어리석어 백성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왕대비의 교지로 왕을 폐하여 원주로 쫓아내었다. 고려는 태조가 개국한 이후 지금의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34명의 왕이 있었고, 왕업을 이어 온 햇수가 475년 만에 망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에 왕을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3년 후에 공양군이 돌아가시니 왕으로 추증하여 봉하였다.

역사 편집을 시작했을 때에는 본래 단군으로부터 조선 왕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덟 편(篇)3)원문에는 편(編)으로 되어 있으나, 편(篇)으로 바로잡는다.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상(上) 세 편4)원문에는 편(編)으로 되어 있으나, 편(篇)으로 바로잡는다.을 먼저 집필한 날에 서문을 작성하여 그 뜻을 서술하였다. 그 후 의논이 점차 달라져서 편찬이 고려에 이르러 중지되어 겨우 다섯 편이 되었다. 원컨대 세상의 군자들이 다행히 전후의 모순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규환(李圭桓) 지(識)5)글을 쓴 후 아무개가 적음이라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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