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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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고사(上古史)
  • 삼국의 항쟁과 신라의 흥성
  •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천도하다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천도하다

이처럼 두 나라가 서로 다툰 지 50여 년이 되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위(魏)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함께 치자고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승려 도림(道琳)을 시켜 백제 왕에게 권하여 궁실과 누각을 장대하고 화려하게 짓도록 하니, 백제의 국력이 피폐해졌다. 이때를 틈타 장수왕이 곧바로 정벌하여 성을 빼앗고 백제 왕을 죽였다. 개로왕(蓋鹵王)의 태자 문주왕이 웅진【공주(公州)】으로 천도하였다. 신하 해구(解仇)가 정사를 마음대로 하다가 왕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왕을 시해하니 태자 삼근(三斤)이 즉위하여 해구를 죽였다. 동성왕(東城王)에 이르러서는 국력이 더욱 미약해졌고 고구려(高句麗)와 전쟁을 한 후로 문자왕(文咨王)이 또 쳐들어왔다. 그러나 동성왕은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연못을 파고 동산을 만들고 궁궐 문을 닫고 간언하는 자들을 거부하였다. 결국 신하 백가(苩加)에게 죽임을 당하고 태자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여 백가를 죽였다.

이로부터 성왕(聖王) 때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문자왕, 안장왕(安藏王), 양원왕(陽原王) 등 여러 왕과 전쟁을 치를 때에 성왕은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따르지 않고 도리어 고구려와 통하였으므로 성왕이 노하여 신라를 쳤으나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신라는 탈해왕(脫解王) 때에 백제 다루왕(多婁王)에게 여러 번 공격을 당하였고, 그 후 벌휴왕(伐休王)으로부터 미추왕(味鄒王) 때까지 변경에서 다툼이 있었다. 고구려와는 대체로 우호 맺기를 위주로 하여 내물왕(奈勿王)은 조카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일본(日本) 군대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하였다.

그 후 실성이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실성은 지난날 내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 눌지(訥祗)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눌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눌지가 즉위하니 이때에 신라는 고구려의 변경 장수를 죽이고 또 백제를 구하였으므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소지왕(炤知王)1)원문에는 소지왕(炤智王)으로 되어 있으나, 소지왕(炤知王)으로 바로잡는다.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과 문자왕이 여러 차례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신라 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또 백제에 고구려가 침략하면 신라가 또한 구원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이 백제 성왕의 청을 따르지 않은 후부터 국교가 단절되어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宣德王) 때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대체로 당시 삼국은 서로 싸워 백성의 목숨을 상하게 하고 국력을 소모하였으나, 오로지 영토를 쟁탈할 뿐이고 도리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를 따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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