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妙淸)이 또 왕의 서경(西京) 행차를 청하여 반역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인종(仁宗) 13년(1135), 지금으로부터 771년 전1)원문에는 772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771년 전으로 바로잡는다.에 묘청 등이 유참(柳旵), 조광(趙匡) 등과 같이 서경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서경 유수(西京留守)의 관리들과 병마사(兵馬使)를 가두고 군사를 두어 절령(岊嶺)【황해도 봉산(鳳山)】의 길을 차단하고 여러 성의 군사를 징발하여 국호(國號)를 천위(天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