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최충헌(崔忠獻)이 나라를 전횡한 지 오래되니 주색에 빠지고 무도해져서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거란[契丹] 군사가 쳐들어왔으나 업신여기고 준비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적의 기세가 더욱 강성하였다. 최충헌이 처음에 군인 출신으로 나라의 권력을 잡아 조정 관리를 죽이고 백성을 아프게 하는 것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보다 심하였고, 그가 옹립한 왕이 4명이고 왕을 폐하기가 2번이었다. 그러나 강조(康兆)와 정중부와 같이 왕을 죽이지는 않았다.
최충헌이 죽은 후에 아들 최우(崔瑀)가 계승하여 최충헌이 빼앗아 차지한 공사(公私) 전토(田土)를 각기 주인에게 돌려주고 벼슬이 없는 가난한 선비를 발탁하여 인심을 수습하였다. 드디어 참지정사 병부 상서(參知政事兵部尙書)가 되고 또 정방(政房)을 자기 집에 설치하여 문사를 선발하여 이에 속하게 하고 필암적(必闇赤)【몽고(蒙古) 관명으로 고려(高麗)에서도 사용하였다.】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