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恭愍王)이 재위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대를 이어 고위 관직에 오른 가문들의 기만과 폐단이 많음을 미워하였다. 이에 승려 편조를 발탁하여 사부라 칭하니,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말을 잘하였다. 국정을 맡겨 편조가 권세를 잡은 지 30일 만에 훈구 대신을 참소, 폄훼하여 이공수(李公遂), 경천흥(慶千興) 등을 파직하고 허유(許猷), 변광수(邊光秀), 홍인계(洪仁桂) 등을 유배하였다. 무릇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는 모두 헐뜯어 그 잔혹함의 불길이 매우 거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