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폐위되어 있던 우왕(禑王)이 은밀히 곽충보(郭忠輔)를 시켜 태조(太祖)를 해치고자 하였지만 곽충보가 도리어 태조께 고하였다. 이에 우왕을 강릉(江陵)【강원도에 있다.】으로 옮기고 창왕은 강화(江華)로 추방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우왕이 즉위한 때부터 이때까지 모두 14년이었다. 신씨(辛氏)가 다른 성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우왕을 자기 아들이라 하여 당시 신하들이 모두 받들어 세웠으니, 또한 예사로운 찬탈과는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음란하고 방자한 행동을 제멋대로 자행하여 고려(高麗)의 국운을 막은 것은 그 죄가 매우 컸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모두 죽였으니 어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