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恭愍王)이 이에 김일 등을 일본(日本)에 보내 해적을 금하라 하였더니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가 답하여 말하기를, “일본에 남북 양조가 병립하여 분란이 그치지 않아 이를 금지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장수들이 여러 번 패배하자 왕이 분노하여 친히 5군을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패하였다. 우왕(禑王) 초에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통신사(通信使)에 제수하여 일본에 보내 해구(海寇)를 금하라 하였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음모가 있는지 의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때마침 고려(高麗) 승려 양유(良柔)가 일본에 있어 그가 첩자가 아님을 증명하여 나흥유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