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忠烈王)이 또 대성전(大成殿)을 지어 유학이 다시 흥하였다. 그러나 정주학(程朱學)을 배우는 자는 아직 없었으나, 충숙왕(忠肅王) 때에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에 가서 정주학을 익히고 귀국하니,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가 그 학문을 따랐다. 또 권부(權溥)가 건의하여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고 우탁(禹倬)은 『정씨역전(程氏易傳)』에 밝아 생도를 가르치니 성리학이 처음으로 행해졌다. 그 후에 이색(李穡), 윤택(尹澤), 권근(權近), 이인복(李仁復)의 무리가 배출되고, 이색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생원(生員)을 증원하였다. 또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이 학관(學官)을 겸하여 학자들이 무더기로 모여드니 성리학이 더욱 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 도덕과 학문이 일대에 으뜸이 된 자는 이색과 정몽주였는데, 정몽주의 이론이 더욱 두드러지게 뛰어나니 유학자들이 탄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