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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안에 국문국(國文局)을 설치하다

당시에 문학과 기술이 이처럼 진보하자 더 나아가 문자를 새로 만들고자 하였다. 무릇 조선(朝鮮)에는 신라(新羅)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두’라 읽는다.】라 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것은 한문을 빌려서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 고대에 만든 것이라 당시에 널리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世宗) 28년(1446), 지금으로부터 460년 전1)원문에는 461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460년 전으로 바로잡는다.에 국문국을 궁궐 안에 설치하시고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28자모를 만들고 초성, 중성, 종성의 3성을 합하여 글자를 만들었는데, 바로 지금의 국문이다. 그 후 중종(中宗)【『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은 때】부터 정종(正宗)【『정음통석(正音通釋)』을 지은 때】까지는 27자를 쓰다가 지금에는 보통 25자를 쓴다. 이때에 명(明)나라 한림 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요동(遼東)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세종께서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황찬을 만나보게 하고 음운(音韻)에 관해 물어본 것이 열세 번이나 되었다. 무릇 이 국문은 문자가 교묘하여 국가 진보에 큰 힘이 되었으니 실로 세계 문자상에 없었던 두드러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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