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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戊午士禍)

무오사화는 처음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김일손은 지난날 이극돈(李克墩)이 전라 감사(全羅監司) 시절에 선왕의 상을 당하여 서울[京師]에 향을 올리러 갈 때 기녀를 데리고 갔던 일을 적었다. 또 세조(世祖) 때의 일을 적다가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함께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이극돈이 당상관이 되어 이 사초를 보고는 대로하여 이를 밀어내려고 하였다. 이때 유자광(柳子光)이 간사한 재주가 있어 이극돈과 한통속이 되고 또 윤필상(尹弼商)이 힘을 보태 큰 옥사를 일으켰다. 이극돈 등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세조를 비난한 것이니 김일손의 악행은 곧 김종직의 가르침이라 무고하면서 김종직의 문인 및 관계 있는 자를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연산군(燕山君)이 또 스스로 “내가 매사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학사(學士) 무리의 소행이다.”라고 언급하여 유자광 등의 계책을 따랐다. 김종직은 이미 죽었으므로 곧 관을 갈라 시체를 베고, 김일손과 권경유(權景裕)를 죽이고, 이목(李穆), 허반(許磐) 등 이하는 모두 멀리 유배 보냈다. 이때에 죄를 입은 유명 인사가 수십 명【강겸(姜謙),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翰), 정여창(鄭汝昌), 무풍부정총(茂豊副正總),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黿), 김굉필(金宏弼), 조위(曺偉)1)원문에는 조위(曹偉)로 되어 있으나, 조위(曺偉)로 바로잡는다.,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姜伯珍), 유연수(柳延秀),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이었다. 그 일이 지금으로부터 408년 전2)원문에는 409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408년 전으로 바로잡는다.인 연산군 4년(1498) 무오(戊午)년에 벌어졌던 까닭에 무오사화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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