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로(金安老)가 신묘(辛卯) 3간을 제거하였으나 사람됨이 간사하고 교활하였다. 또 글과 그림에 재주가 있어 처음에는 이언적(李彦迪), 박소(朴紹) 등을 따랐다. 또 정광필(鄭光弼)을 몰아내고 자기 무리를 끌어들여 조정에 가득 채우자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등이 주구가 되어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종친과 공경 대신을 죽이거나 내쫓고, 생사여탈권을 마음대로 하여 기세가 뜨겁게 타올랐다. 참판(參判) 윤안인(尹安二)【문정 왕후(文定王后)의 숙부】이 문정 왕후【중종(中宗)의 계후】께 고하여 왕께 알리니 왕이 윤안인에게 김안로 등을 죽이라 하셨다. 윤안인이 대사헌(大司憲) 양연(梁淵)과 논의하여 김안로와 허항, 채무택을 사사하였다. 이때가 중종 32년(1537) 정유년인 까닭에 정유 3흉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