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학(程朱學, 정자와 주자의 학문, 곧 성리학)이 고려(高麗) 때부터 행하여졌다. 고려 말에 정몽주(鄭夢周)가 도학과 기절(氣節)이 두드러졌다. 정주학은 조선(朝鮮)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였다. 이름난 사람으로는 김굉필(金宏弼)【한훤당(寒喧堂)】, 정여창(鄭汝昌)【일두(一蠹)】, 조광조(趙光祖)【정암(靜菴)】, 이언적(李彦迪)【회재(晦齋)】, 이이(李珥)【율곡(栗谷)】, 성혼(成渾)【우계(牛溪)】 등이 있다. 그 중 이황은 특히 진유(眞儒)라 칭하였다. 이에 유학을 익힌 자가 노장(老莊)의 말을 쓰면 내쫓았고, 또 육왕(陸王)1)송(宋)나라 육구연(陸九淵)과 명(明)나라 왕수인(王守仁)을 합한 말로, 이들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 일컬어진다. 특히 왕수인의 학설은 양명학(陽明學)으로 불린다.의 말도 하지 못하게 하니 점점 정주와 의견이 같지 않으면 모두 배척하였다. 이러한 학풍은 학문을 좁히고 제한을 주었으나, 그 학문의 융성이 고려 시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화도 또한 이로 인하여 여러 번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