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진주를 함락하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은 전사하였다. 처음에 김천일이 의병 수천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에 진주하였는데, 적이 해상으로 물러나자 김천일 등이 다시 남하하여 진주를 수비하였다. 적에 맞서 싸운 지 9일 만에 크고 작은 전투가 1백여 회였다. 적을 매우 많이 죽였으나 중과부적이라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김천일이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와 황진(黃進) 및 복수장(復讎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북향재배하고 강에 몸을 던졌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과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 등이 또한 따라 죽었다. 성안의 선비와 부인 중 강에 뛰어들어 죽은 자가 7만이었다. 임진왜란[賊亂]이 일어난 이래 패배의 참혹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적이 진주를 점거하니 이때 관기 논개(論介)가 적의 장수와 촉석루(矗石樓)에서 놀며 즐기다가 적장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또 유생 김덕령(金德齡)은 광주(光州)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김덕령이 신력이 있어 용맹하고 날래기가 나는 새와 같았다. 전쟁 이래 의병 수백 개 부대가 모두 패하였다. 김덕령이 장사 최담령(崔聃齡) 등과 함께 5천여 명을 모아 지휘부를 세웠다. 후에 간신(姦臣)에게 무고를 당하여 원통하게 죽으니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이 분하고 한스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