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앞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군이 강함을 두려워하였다. 또 날씨가 점차 추워져서 군사들을 경상도 남쪽으로 퇴각하게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蔚山)에 주둔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순천(順天)에 주둔하고,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은 사천(泗川)에 주둔하니 그 길이가 6, 7백리 해안에 연하였다. 명군이 더욱 득세하여 형개(邢玠)는 한양[京城]에 머물고 양호(楊鎬)와 마귀(麻貴)는 삼협병(三脇兵) 4만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갔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좇아 경주(慶州)에서 회합하고 드디어 울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울산은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한 곳이었는데, 성안에 양식이 부족하여 곤궁이 더욱 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