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유영경(柳永慶)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서야 왕릉을 범한 도적들【임진란 때 왜군이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능을 도굴했음.】을 잡아 와 참수한 뒤 화의가 비로소 이루어졌다.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1)원문에는 301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300년 전으로 바로잡는다.에 첨지(僉知) 여우길(呂祐吉)에게 회답사(回答使)【통신사(通信使)라는 이름을 꺼려 바꿈.】를 제수하여 일본(日本)에 보내 화의가 비로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