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광해군(光海君)이 임진왜란(壬辰倭亂) 후에 국정을 혁신하지 않고 정사가 부패하여 결국 폐위에 이르렀다. 또 서인(西人)은 북인(北人)이 벌어진 틈을 타서 세력을 만회하였다. 이귀(李貴) 등이 처음에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민생을 구한다고 하였으나, 공업(功業)이 이미 이루어진 후에는 죄인의 가산과 기복(器服)을 몰수하여 각기 나누어 주었으니 이 어찌 죄과가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해(李澥)는 이 의거에 참여하였으나 깊이 후회하여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