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명(明)나라는 도적들로 곤란을 겪고 있어 조선(朝鮮)을 구원할 힘이 없었다. 겨우 등래 총병(登萊總兵) 진홍범(陳洪範)이 수군을 이끌고 도우러 왔으나 바람의 기세가 불리하여 배를 띄우지 못하였다. 각 도 감사와 병사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뿐이고 나아가는 자는 또 패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는 금천(衿川)【광주(廣州)】에서 전군이 함몰되었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허완(許完)과 우병사(右兵使) 민영(閔栐)은 쌍령(雙嶺)【광주】에서 패하여 죽었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은 광교산(光敎山)【광주 서남쪽】에서 싸워 청(淸)나라 장수 액부양고리(額駙揚古里)를 죽였으나 또한 무너져 흩어졌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강원도】에서 전사하였고 부원수(副元帥) 신경원(申景瑗)은 철옹(鐵瓮)【평안도】에서 사로잡혔다. 당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양식이 부족하고 군졸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여러 겹의 포위에 빠진 지 40여 일이니 그 참상은 차마 말로 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왕이 홍서봉(洪瑞鳳) 등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청나라 태종(太宗)이 왕이 친히 맹세할 것을 요구하고 또 패맹 대신(敗盟大臣) 2~3명을 포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