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서 강화(江華)에 빈궁과 왕자 외에 여러 신하의 처자식이 많이 피난해 있었다. 판윤(判尹) 김경징(金慶徵)은 검찰사(檢察使)가 되고 이민구(李敏求)는 부검찰(副檢察), 유수(留守) 장신(張紳)은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막아 지키고 있었다.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팔기군(八旗軍)에게 작은 배 80척을 만들게 하고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에게 명하여 강화를 공격하였다. 이때에 김경징은 험한 지세를 믿고 대비를 하지 않았고 또한 술에 빠져 지냈으니 청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널 때에 군사가 싸우지 않고 스스로 무너졌다. 김경징, 이민구, 장신 등이 모두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빈궁과 왕자, 여러 신하의 처자식 2백여 명이 포로로 잡혔고 대신 김상용(金尙容) 이하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