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肅宗) 즉위 초에 윤휴(尹鑴)가 북벌할 뜻을 주창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후환을 우려하여 실행하지 않았다. 숙종 30년(1704) 갑신(甲申), 지금으로부터 202년 전1)원문에는 203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202년 전으로 바로잡는다.은 명(明)나라 의종(毅宗)이 사직에 몸을 바친 지 60년 되는 해였다. 이에 금원(禁苑)에서 제사하였다. 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여 신종(神宗)에게 제사하였다. 이때 기근이 연이어지고 붕당(朋黨)의 다툼이 날로 심하여 북벌의 뜻이 스스로 멈추었다. 기근 때에는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현엽(玄曄)이 쌀 수만 석을 보내 오니 자못 이웃을 근심하는 정을 보였다. 그러나 영조(英祖), 정조(正祖) 때까지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오직 표면으로만 복종하니 조선(朝鮮)인이 명나라, 청나라 2대 간에 어떻게 마음을 썼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