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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淸南), 탁남(濁南)

효종(孝宗) 이후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분쟁이 최고로 성하였다. 효종이 돌아가실 때에 혹은 자의 태후(慈懿太后)【인조(仁祖)의 계후(繼后) 조씨(趙氏)】의 복제, 혹은 영릉(寧陵)【효종】을 천봉(遷奉)하는 일에 조정 신하와 유생의 의논이 분분하여 그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남인이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에 반대한 때문이었다. 숙종(肅宗) 초에 이르러 송시열을 유배한 후에 허적(許積)이 영의정(領議政)이 되더니 곧이어 권대운(權大運), 허목(許穆)이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남인이 크게 세력을 얻었다. 유명천(柳命天)이 이옥(李沃)이 송시열을 아첨하여 섬겼다고 탄핵하여 이옥을 유배하였다. 그 후로 서로 각을 세워 다투니 드디어 청남, 탁남의 명목이 있게 되었다. 청남이라 함은 좌의정 권대운 이하 의논이 엄격하고 격렬한 자들이고, 탁남이라 함은 영의정 허적 이하 온화설(溫和說)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권대운 등이 송시열을 죽이고자 할 때 허적과 민희(閔熙) 등이 듣지 않았다. 이에 청남의 무리 허목이 허적을 제거한 후에야 뜻한 바를 이룬다 하고 상소하였다. 이 상소에서 허적이 권력을 휘두르고 사사로이 당파를 지은 일과 귀척(貴戚)을 맺어 나라를 그릇치고 백성을 해한 죄를 논하였다. 왕이 “이는 권대운, 이옥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고 권대운, 이옥, 이봉징(李鳳徵) 등을 유배 보내고 허적을 더욱 우대하셨다. 후에 전횡이 심하고 당의 무리가 맹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미워하여 허적의 사직을 허락하였다. 이원정(李元禎), 윤휴(尹鑴), 민종도(閔宗道), 오정위(吳挺緯) 등을 유배하고 점점 서인을 등용하여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되니 남인의 세력이 비로소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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