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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인을 크게 등용하다

남인을 크게 등용하다

그러나 요직을 차지한 자는 모두 서인(西人)이었다. 숙종(肅宗)이 소의(昭儀) 장씨(張氏)를 총애하고 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인조(仁祖)의 아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아들】을 아끼는 것이 과도하였다. 박세채(朴世采)【이조 판서(吏曹判書)】, 남구만(南九萬)【영의정(領議政)】, 여성제(呂聖齊)【우의정(右議政)】 등이 간하다가 남구만, 여성제는 유배되었다. 장씨가 경종(景宗)을 낳자 곧 동궁으로 책봉하니 남용익(南龍翼)【이조 판서】, 유상운(柳尙運)【호조 판서(戶曹判書)】, 윤지완(尹趾完)【병조 판서(兵曹判書)】, 최규서(崔奎瑞)【대간(大諫)】, 김수흥(金壽興)【영의정】 등이 원자 책봉이 빠르다는 것으로 간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오히려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책봉하셨다.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동궁 책봉을 논하니 왕이 그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상소하는 것에 노여워하셨다.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熏)1)원문에는 남치훈(南致薰)으로 되어 있으나, 남치훈(南致熏)으로 바로잡는다., 윤빈(尹彬) 등이 이때를 틈타 몹시 북돋우니, 이에 송시열은 제주(濟州)에 유배되고 김수흥은 파직되고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이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이 되어 이로부터 남인(南人)이 다시 크게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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