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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빙이 처음 끊어지다

교빙이 처음 끊어지다

일본(日本)과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집정하던 초기부터 오래도록 사절을 주고받았는데, 일본이 서양 여러 나라와 강화한 후에는 조선이 일본을 의심하여 처음으로 교빙(交聘) 의례가 끊겼다. 그러다가 일본이 유신 초에 소 시게마사[宗重正]를 통해 국서를 가지고 와 교빙을 되돌리려 하였다. 이때 대원군(大院君)이 그 언사와 인장이 전과 다르다고 꾸짖어 받아들이지 않았다【이전에는 관백(關白)이 서계(書契)를 통해 우리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왕복하더니 지금에는 일본이 왕정이 복고되었다 하고 소 시게마사가 가지고 온 문서 중에 ‘일본 황제’ 또는 ‘칙서’ 등의 구절이 있었다. 그러므로 대원군이 전날의 서계와 같이 고쳐 오라 하여 받지 않은 것이다】.

그 후에 또 사신을 보내 쓰시마 섬[對馬島]의 무역선을 없애고 관리를 부산(釜山)에 주재시켰다. 대원군이 다시 말하기를, “부산에 있는 일본 관리의 복장이 전과 다르니 이는 오랑캐에게 제도를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하고【당시 일본 관리가 양복을 입었다.】 더욱 경멸하였다. 또 8도에 포고를 내려 일본과 관계를 끊는다 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이 조선에 무력을 쓰지 아니하면 이 일을 분별할 수 없겠다 하여 소위 정한론(征韓論)이 분분하다가 마침내 출병하지 못하였다.

대원군이 이미 세력을 잃고 민규호(閔奎鎬)와 민영익(閔泳翊)이 서로 이어 집정하자 일본과 수교할 뜻으로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일본에 보냈다. 곧이어 경상, 충청, 전라 3도 유생의 상소로 다시 대원군을 청하여 집권하게 되었으나 대원군의 세력이 크지 못하여 전날과 같이 일본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조약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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